<15화>

“우와............”

도시락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계란말이에 소시지, 브로콜리가 들어 있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부초밥이 몇 개 있었다.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바로 밥이다. 분명히 새하얀 쌀밥인데, 그 위에 케첩으로 하나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잘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은 현실로써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死인가..........”

순백의 평야에 붉은 산맥이 대지를 멋들어지게 갈라놓았는데, 그 붉은 산맥은 흡사 死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死다. 그것 이외엔 떠오르는 게 전혀 없다. 이건 분명히 死란 글자다. 왜 이런 글자가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다.

‘무슨 독극물이라도 들어가 있는 거냐....’

마치 ‘먹고 죽어라.’라는 느낌이 드는 케첩의 위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에 섣불리 음식에 손을 못 대고 있는데, 힐끗 옆을 보니 그녀가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을 관찰하는 사육사처럼 나를 지켜보는 그녀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먹기 시작해야 그녀도 밥을 먹을 것 같다.

‘마치 실험실에 감금당한 실험자가 된 기분이다......혹시 요리에 자신이 없는 건가? 그래서 나에게 테스트를?!’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받아버린 물건, 이대로 다시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인가....’

(꾸르르륵)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위는 계속 음식을 넣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굶주림에 나의 판단력은 점점 흐려졌고, 결국 나는 각오를 다지고 가장 평범해 보이는 계란말이를 일단 먹어보기로 했다.

‘설마 도저히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짜다던가.......그런 건 아니겠지?’

계란말이가 혀에 닫기 0.1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걱정을 했다. 그리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나서 계란말이를 혀 위에 얹고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우물 우물)

“...............으음?”

계란말이의 맛은.......아주 맛있었다.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적절한 맛이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계란말이를 몇 번 만들어봤지만 이 정도로 완벽한 맛은 처음 느껴보았다. 사람의 손으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어때?”

나를 지켜보고 있던 도시락 제공자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은데. 이걸 정말 네가 만든 거야?”

“요리 실력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난 또 대 실패작을 먹게 된 줄 알았잖아.”

“실패작이라곤 단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히죽하고 웃으면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실컷 골려먹다가 끝날 쯤에 풀어주는, 흡사 작은 악마 같았다. 사실 따지면 처음부터 걱정만 한 나의 잘못이지만.

“그럼 고맙게 잘 받아먹겠어.”

다음 타깃은 유부초밥. 어떤 감미로운 맛이 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나의 기대를 한껏 받으면서, 유부초밥은 나의 입에 들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물 우물)

“.................”

“.....................”

“매워!!!!!!!!!!!!!!!!!!!!!!!!!!!!!!!!!!!!!!!!!!!!!!!!!!!!!!!!!!!!!!!!!!!!!!!!!!!!!!!!”

나는 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모두 이쪽을 보게 할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

방금 먹은 내 유부초밥에서 아주 강렬한 겨자의 맛을 느꼈다. 아니, 이건 그냥 겨자로만 양념을 한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다!! 아니!! 이건 그냥 겨자덩어리다!! 살인 무기다!!

“......겨자를 실수로 너무 많이 넣어버린 유부초밥이 있으니까 조심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민폐녀와 마찬가지로 이 ‘작은 악마’에게 꼭 복수하겠다고.

(딩- 동- 댕- 동-)

드디어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이 지루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집에 돌아가면 사쿠라 씨의 잔소리를 또 들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것 보다는 그쪽이 더 좋다고 생각 되었다.

“저기, 세이토 군.”

뒤에서 코토리가 날 불렀다. 가방을 싸던 것을 멈추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시야엔 곧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난 그녀를 보곤 한마디 했다.

“군도 빼. 왠지 거북하니까.”

“그래? 그럼 세이토.”

“왜?”

“세이토는 부활동이라던가 할 생각 없어?”

“부활동이라....”

나는 잠시 예전 세계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전 세계에선 동아리에 들어갈 정도로 활발하게 뭔가 해본 기억은 없다. 부활동을 하면 그만큼 자유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혼자서 이것저것 해보길 좋아하는 나에게는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쎄. 난 혼자서 행동하는 타입이라서 말이지.”

난 별로 내키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코토리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 아쉽네. 세이토에게 매니저 역할을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응? 왠 매니저? 역시 연예인 쪽으로 진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친구들과 취미삼아 밴드를 하고 있는데, 와서 공연을 해달라는 곳이 있어서 말이야. 밴드 연습하랴, 일정 관리하랴, 이래저래 힘들거든.”

“호오. 그 정도로 코토리의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아니, 아니, 그렇진 않아.”

코토리는 웃으면서 내 말을 부정했지만, 난 그녀를 보면서 확신했다. 코토리가 보컬로 들어가 있는 밴드라면, 나머지 사람들의 실력이 충분하다면 대성할 게 틀림없다고. 왜 그녀가 그쪽으로 갈 생각을 안 하는지 나로선 의문이다. 예전 세계에서는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에게도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일까.

“미안하지만 난 내 일정도 관리를 못 하는 남자라서 말이지. 타인의 일정까지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아니야. 내가 괜히 무리하게 부탁한 것 같아서 미안해.”

“미안할 건 없지. 그냥 권유한 것뿐이니까.”

“그런가? 뭐 그럼 그렇다고 치지 뭐.”

항상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난 같은 반이 된 코토리에게 감사했다.

난 원래 타인들과 잘 섞이는 편이 아니라서 솔직히 이렇게 빨리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거라곤 상상하지 못 했다. 비록 한 명 뿐이지만 등교 첫날부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밴드 연습?”

내 말에 코토리는 고개를 저었다. 매일같이 연습을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쇼핑.”

“같이 밴드를 하는?”

“응.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줄게.”

“뭐, 내키면.”

“그럼 난 이제 가볼게. 친구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코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고, 나도 돌아갈 준비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응. 조심해서 돌아가.”

그녀는 교실을 나가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고, 난 적당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음....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할 건 없을 테니까, 교내를 좀 돌아다녀 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방을 들고 교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내부 구조를 알기 위해서 1층 현관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곳까지 가면서 지나치는 교실들에는 청소를 하거나 잡담을 떠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설마 내가 중학교 생활을 다시 할 줄이야. 그리운 모습들이다...’

일단 나도 예전 세계에서는 대학생이란 존재였으니 여러 가지 추억이란 것이 있다.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선생님께 걸려 크게 혼이 났던 기억이라던가, 친구들과 당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교했던 기억이라던가, 한밤중에 학교에 몰래 숨어 들어와 담력테스트를 하던 기억이라던가.

“그나저나 중학교 내용이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예전에 공부 좀 많이 해둘걸.”

라고 생각을 해보지만 그것은 과거, 지금 내가 중학교 과정을 다시 배우는 입장이라는 것은 현실. 후회해도 너무 늦었다. 다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후회라던가 늦었다던가가 통하지 않지만.

“오. 도착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사이에 난 1층 현관에 도착했고, 별 어려움 없이 학교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알림판을 찾을 수 있었다.

“음.....오늘은 도서실에 잠시 가볼까.”

부활동을 할 생각이 없으니 동아리 방에 갈 이유는 없고, 음악실이나 과학실 등에도 갈 이유가 없다. 그런 소거법으로 하나 둘 제거하다보니 남은 건 도서실이었다.

“뭐, 흥미로운 책이 있다면 좀 읽다가 오면 되겠지.”

목적지가 결정되자, 나의 걸음을 빨라졌다. 평소 이동시에 내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목적지까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힘 낭비가 많아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습관이 들어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왜 도서실이 3층에 있는 거야....”

알다시피 난 방금 전까지 1층에 있었다. 그러나 도서실은 3학년 교실이 있는 3층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난 다시 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손해면 손해지 절대로 이득은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토리에게 위치 같은 건 미리 물어둘걸...”

정확하고 친절한 설명서가 자기 근처에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버스가 오는 정거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지금 나의 경우는 후자다.

“좋아...다 도착했다...”

‘기회가 되면 사쿠라 씨에게 건의를 해야겠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기계들을 두기엔 카자미 학원은 그리 큰 편은 아니라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한번쯤은 건의를 해봄직한 사항이라고 생각한 나는 언젠가 사쿠라 씨에게 말을 꺼내기로 다짐했다.

“드디어 도착인가...”

계단에게 온갖 불평을 다 보내면서 걸어온 결과, 도서실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디보자....지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난 도서실 문 앞에서 머리를 굴려 지금까지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서실에서 보낼 시간을 도출해냈다.

“좋아. 일단 30분정도는 있어보자. 여기엔 어떤 재미있는 책들이 날 반겨줄까. 기대되는데.”

본디 책을 장시간 읽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30분이면 적절하다고 생각한 나는 이곳에만 있는 특이한 책이 날 반겨줄 것을 기대하며 도서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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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까지 썼는데... 아직도 3화나 더 올려야 하는군... =-=;;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4화>

(드르륵)

시원스럽게 열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살며시 감으며 가슴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고작 이거 하나 보자고 그 고생을 한 거냐....’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해프닝이 일어나니 정신적으로 너무 지칠 것만 같다.

‘수업 시간엔 잠을 좀 자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내 정신력이 못 버틸 것 같다...’

라며 눈을 떴는데....

“..............”

“...............”

모든 이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문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고, 내 뒤에 누군가 서 있어 그 사람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있었던 덜커덩 사건으로 보아, 아무래도 내가 이 상황의 주인공인 것 같다.

‘아....시선이 따갑다....’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 하는 상황에서 나는 간신히 눈을 굴려 교실을 살폈다. 처음 보는 나를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고, 별로 반기지 않는 표정도 보였다. 특히 남학생들 사이에서 나를 싫어하는 눈치가 잘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서 안식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라며 한숨을 쉬던 그 때

“아! 사쿠라이 군이다!”

갑자기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그 목시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으엑?!”

“‘으엑?!’이라니. 너무하잖아......”

한 번 만난 것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되는..............은 너무 심했고, 어쨌든 보기 드문 미소녀인 시라카와 코토리가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나랑 같은 반이었어?!”

손을 흔들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루 동안 못 봤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다.

“여......여어.”

“‘여어.’가 아니잖아? 어제는 왜 안 나온 거야?”

“응?! 어떻게 네가 그걸 알고 있어?!”

깜짝 놀라는 나를 보며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대답했다.

“어제는 전체 조회가 있었어. 학원장이 특별히 전교생 앞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것 같던데 네가 없어서 정말이지 난리도 아니었어.”

“.....무슨 생각인 거야 그 사람은.”

그녀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사쿠라 씨는 당시 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조회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화를 냈다고 한다. 만약 어제 내가 결석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있었을 것 같아, 무단결석을 한 것을 스스로에게 고마워했다.

“어쨌든, 어제 사쿠라이 군이 오지 않았으니 내기는 내가 이긴 거지?”

“.......그래. 내가졌다.”

“근데 어째서 오지 않았던 거야?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 거야?”

라며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 이마에 올렸다. 갑자기 따뜻한 손의 감촉이 느껴져 조금 놀라긴 했지만 별 거 아니라서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주변에서 원망의 눈길이 나에게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너희들의 그 마음, 내가 이해는 한다만 그건 너희들이 인연이 없다는 증거야.’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나는 그녀가 손을 땔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곧 그녀는 손을 이마에서 때면서 말했다.

“음...열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네.”

“당연하지. 얼굴이 멀쩡하잖아.”

“겉은 멀쩡하고 속은 엉망일 수도 있으니깐.”

그녀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한 마디 해주려고 했던 나는 그녀가 웃으면서 말하자 그럴 마음이 날아가 버렸다. 비겁하다면 비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같은 반이라면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지? 그곳이 내 자리겠지 뭐.”

“응. 바로 내 앞자리야.”

‘아니, 나를 노려봐도 자리는 안 바꿔 주니까.’

내 자리가 그녀의 앞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 교실 내 남성들은 살벌하게 나를 노려봤지만, 창가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선 시라카와 코토리란 미소녀가 내 근처에 앉아 있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 세계에서도 항상 창가에 자리를 잡았었고, 밖을 바라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편이라 교수님에게 많이 혼났었지만, 그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창가를 반가워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난 내 자리로 돌아가서 창밖과 책상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창가란 말이지..... 명당이라서 다행이네.”

“어때? 내가 근처에 있어서 기쁘지 않아?”

“응?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건데? 난 그저 창가가 좋을 뿐인데?”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보단 좋지 않아?”

“글쎄다. 난 아웃......이 아니라 원래 혼자서 행동하는 타입이라.”

하마터면 예전 세계에서 쓰던 단어를 꺼낼 뻔했지만 재빨리 적당한 표현으로 바꿔서 대답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딱히 집요하게 물어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하나.”

“응?”

“성으로 부르는 건 썩 내키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그냥 세이토라고 불러줘.”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나 자신이 ‘사쿠라이’라고 불리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친한 사람들에게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이쪽은 예전 그대로니 별로 위화감이 없을 테니까.

“음....그럼 나도 코토리라고 불러도 좋아.”

“응? 아니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만 이름으로 부르면 재미없잖아?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해.”

“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저기 나를 노려보는 녀석들의 시선이 부담된다.’

내가 조건 없이 그녀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에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분위기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앞으로 내가 고생을 좀 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휴.......집이나 이곳이나 편한 곳이 없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코토리도 나를 따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들이 자리에 앉자 우리들을 보고 있던 학생들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갔다.

수업은 평범했다. 비록 놀고먹는 대학생이었지만 나도 나름의 지식이 있었고 그것을 잃지 않고 이쪽 세계로 넘어왔기 때문에, 수업에서 뒤처지지 않았고 평소처럼 창밖을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었다. 생각이라고 해봤자 별 거 아닌 것들이지만 시간을 보내기엔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

어느 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나는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아. 나 돈이 없지.”

그렇다. 난 아직까지도 사쿠라 씨에게서 돈을 받지 않았다. 모든 걸 사쿠라 씨가 준비해줬다 보니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카자미 학원은 배식제가 아니라 도시락을 싸오든, 학생식당에서 식권을 사든,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먹든, 자신의 사비로 해결해야만 했다.

“굶으면서 오후를 버틸 순 없고.... 어쩐다?”

사쿠라 씨나 오토메 누나를 찾아가는 건 포기했다.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당연히 물어물어 가야할 테고, 그것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난 귀차니즘과 배고픔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귀차니즘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민폐녀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 그녀석이 도와줄 리가 없고.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음......역시 사쿠라 씨한테 가야하나...”

코토리는 선약이 있어서 교실에서 나간 지 오래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 건 무리.

이대로 굶을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들 중에서 가장 속편한 선택지는 바로 사쿠라 씨에게 가서 돈을 받아오는 것. 타인에게 돈을 빌리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누가 공짜로 주면 또 모를까.

“...............”

사쿠라 씨에게 갈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여학생이 보였다.

“...............”

“................”

그녀는 롤 헤어를 하고 있었고 남색의 커다란 리본으로 새하얀 머리를 묶어두고 있었다. 키는 꽤 작아보여서 귀여움이 잘 느껴지는 어린 동물 같았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녀 또한 코토리나 오토메 누나에 뒤지지 않을 한 미모 하는 사람이었다. 조금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따뜻한 사람일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를 지긋이 보고 있는 그녀의 책상에는 연 파란색의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가 있었다. 크기나 형태로 보건데 저것은 도시락이다.

“..............”

“................”

나나 그녀나 서로를 쳐다볼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뭔가 저쪽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기다려 봐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말을 걸기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응?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데.”

“아, 그래?”

“응.”

살짝 웃어 보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나를 비웃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

“................”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된 침묵. 솔직히 좀 거북하다. 이렇게 그녀를 보고만 있는 것으로 배가 부른다면 얼마든지 보고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니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먹을래?”

“응?”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멍하니 있던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 했다.

“.....뭐라고?”

“먹을래?”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있는 물건을 내 쪽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저것이 먹을 것이란 건 확실 한 것 같다. 하지만 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그건 네 몫이 아니었나?”

“실수로 2인분을 싸버렸거든. 버릴 수도 없어서 일단 들고 오긴 했는데 어떻게 처리할 지 고민 중이었거든.”

“흠. 그렇단 말이지.....”

“마침 배는 고픈데 돈이 없어 보여서 너라면 먹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틀려?”

“아니, 일단 배도 고프고 돈도 없는 건 맞지만........”

“맞지만?”

내가 바로 받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가 바로 받아먹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는 눈치다. 물론 나도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바로 받아서 먹고 싶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나한테 어째서 이런 걸?”

“난 2인분을 먹을 만큼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야. 돈 낭비도 하고 싶지 않으니 불우한 이웃을 도우려고 한 것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도시락을 내 쪽으로 내밀었고, 나는 일단 그것을 받기로 했다.

“고마워. 답례는 나중에 하지.”

“.........후훗.”

“...............”

순간 그녀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것 같다. 순간 흠칫했지만, 다시 보니 아까 전의 차가운 느낌이 조금 드는 표정이었다.

‘착각인가...?’

굶주림 때문에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빨리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치는 위를 위해서 서둘러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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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붙을 하고 나면 한글이 안 쳐지는 딜레이 현상이.. ㄱ-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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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렇게 맞이한 다음 날. 결전의 날이다.

부스스 일어난 나는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도중에 계단에서 발을 삐끗해 구를 뻔 했지만, 순간적인 발 조작으로 아침부터 고통에 몸부림치는 해프닝을 막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작 더 큰 해프닝을 못 막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

“아.”

화장실 문을 연 순간, 반쯤 떠 있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사쿠라 씨였다. 단순히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려는 사쿠라 씨와 만났다.’라는 스토리는 괜찮다. 허용범위다. 하지만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아직 이용 중이던 사쿠라 씨와 만났다.’라는 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해프닝이다.

“............”

“............”

깜짝 놀란 사쿠라 씨의 표정은 상당히 귀여웠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외형은 일단 어리니 표현은 이쪽이 더 걸맞다.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거지만.

“............”

“...실례했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사쿠라 씨가 나온 그 후가 두려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그 물을 다시 담을 능력이 없다. 그냥 죽도록 사죄할 뿐.

그 후 밥을 먹고 교복을 입은 후 집에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사쿠라 씨의 질책은 끊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내가 카자미 학원의 위치가 어디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쫓기는 기분으로 집을 나왔을까.

허겁지겁 밥을 먹어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했으며 위치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귀차니즘을 자극했고, 결국 나는 그 날 무단결석을 했다. ‘될 대로 되라.’가 쓸데없이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섬을 돌아다니면서 지리를 익히다가 저녁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쿠라 씨가 화가 많이 난 표정으로 날 맞이하셨다. 물론 나를 보자마자 하시는 첫 마디는

“어째서 오지 않은 거야!!!”

...였다.

“하아.................”

따뜻한 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 전체로 퍼지는 따뜻함이 어제 오늘 쌓였던 피로를 한 방에 날려 보냈다. 자취를 하던 예전 세계에서는 샤워는 자주 했어도 목욕은 자주 하지 않았었다. 돈을 아끼겠다는 것이 1순위 이유였고, 대중탕까지 가는 게 귀찮다는 게 0순위였다. 이 집에는 욕실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할 때마다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역시 매일 사용하면 수도세가 장난 아닐 텐데.......”

여기서 돈을 버는 입장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사쿠라 씨가 말하셨지만, 얹혀사는 입장인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다. 적당히 적응이 되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저녁도 먹었고, 학교는 결석을 했으니 숙제 같은 건 나에겐 없고......자기 전까지 뭘 하지?”

자기 전까지 비어있는 시간동안 뭘 할지가 걱정이었다. 거실에 가서 TV를 보는 건 사쿠라 씨가 무서워서 무리고, 그렇다고 방에서 뭔가 하자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섬을 돌아다니면서 상점가에 있는 책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들을 구경하긴 했지만, 돈이 없어서 사오지 않았기 때문에 독서를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교과서를 읽는 짓은 안 한다.

“근데 뭔가 하나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뭔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기억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사소하다고 느꼈던 건 금방 잊고 마는데, 지금 잊고 있다고 생각되는 무언가가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누구랑 약속을 잡았던 것 같기도 한데................응? 약속?”

‘약속’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그 단어는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속 맴돌던 그 단어는 조금씩 형태가 변하더니, 결국엔 ‘내기’란 단어로 변해버렸다.

“...................아!!!!!!!!!!!!!!!!!!!!!!!!!!!!!!!!!!!!!!!!!!!!!!!!!!!!!!!!!!!!!!!!!”

난 순간 옆집에서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욕실이라서 그런지 나의 외침은 아주 뚜렷하고 크게 들렸다.

“코토리와 내기를 했었지..... 왜 잊고 있었던 거지!!”

그제야 나는 코토리와의 내기를 떠올렸고, 내가 내기에서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윽. 내가 그 중요한 내기를 잊고 있었다니.... 이건 다 사쿠라 씨 때문이야!!”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리면 그걸 방해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했던가. 나름 여러 가지 대응 방안을 생각해뒀었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아아아아아.....그냥 물어물어 갈걸...”

뒤늦게 후회를 해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엎질러진 물. 또 말하는 것 같지만 난 그 물을 원래대로 할 수 없다. 그냥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이상하게 일들이 꼬이네.”

어제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사쿠라 유메라는 민폐녀와의 에피소드, 오늘 아침에 있었던 화장실 에피소드, 그리고 코토리와의 내기. 전부 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이긴 하지만, 모두 나에게 안 좋은 쪽으로 끝났기 때문에 조금 미심쩍다.

“...혹시 흑막이 있다던가...?!”

같은 이상한 생각을 할 정도로, 나의 요 근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정확하게 집어내자면 사쿠라 씨가 나를 찾아왔던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야. 그냥 우연이겠지.”

고개를 흔들면서 애써 부정을 하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 나는 눈을 감고 잠수를 했다. 머리를 물속에 넣으면서 생긴 물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끼면서 머릿속에 있던 불안감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너무 오랫동안 들어가 있어서 욕조에서 나온 후 잠시 기절했었다는 건 나밖에 모르는 나의 에피소드다.

그렇게 나의 등교 첫 날은 허무하게 날아갔고, 원래 두 번째 날이어야 정상인 내 등교 첫 날.

“저기, 위치만 알면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난 나의 양 옆,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인건가, 아니면 안 들렸던 건가.

‘무시.......겠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안 들렸을 리 없다. 이건 100% 무시다. 나는 다시 한 번 말을 하기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이젠 나 혼자서도.....”

“안 돼. 혼자 보냈다간 또 옆길로 샐 거야.”

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나의 말을 잘라먹었다. 지금 나의 상황은 찍소리도 못 하고 끌려갈 판이다.

‘샐 지도 몰라가 아니라 샐 거야라니.... 나의 신용도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군...’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인정은 하지만, 나도 사람인 이상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논할 권리는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가지고 한 번 더 말하기로 했다.

“난 어린이가 아니니까....”

“네. 어린이는 아니죠. 그냥 변.태.일 뿐이죠.”

“......................”

이번엔 내 왼쪽에 있는 사람이 나의 말을 잘라먹었다. 순간 내 가슴 속에선 분노가 솟아올랐지만, 그것을 표출하지는 못하기에 내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다.

‘아...아직 포기하면 아니 된다. 나는 당당하다. 내가 밀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마음속으로 힘껏 자신을 응원한 후,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사쿠라 ㅆ.....”

“딴 맘이 없다면 그냥 우리들이랑 같이 가도 상관없잖아! 그냥 걸어!”

“.......................”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격퇴. 3전 3패로 나의 완패다. 이젠 덧없이 끌려간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처한 자기 자신이 조금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 오른쪽에는 오토메 누나가, 왼쪽에는 아사쿠라 유메라는 민폐녀가, 그리고 내 뒤에는 사쿠라 씨가 바짝 붙어서 내가 옆길로 새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이게 다 어제 있었던 나의 무단결석 때문인데....

“어째서 오토메 누나까지 날 감시하는 거야?!”

난 오토메 누나를 보면서 따졌다. 사쿠라 씨가 날 감시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녀까지 날 감시하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학생회장이고 이웃사촌이니까 당연하잖아!”

깨갱.

어련하시겠습니까. 물어본 제가 잘못했지요. 네, 죄송합니다.

이번엔 대상을 바꿔서 민폐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은 말을 걸고 싶진 않았지만, 내 왼쪽에 바짝 붙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넌 뭐야.”

“좋아서 있는 거 아니니까 닥쳐주세요.”

“싫으면 비켜.”

“나도 싫어! 근데 언니가 시키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있는 거야!”

이런 반응은 좀 오랜만이랄까 신선했기 때문에 왠지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조금 생각해보면, 사이가 나쁘면 은근히 놀려먹기 아주 편하다. 라고 생각한 나는, 그녀를 조금 놀리기로 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날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언니가 시키는 거라곤 하지만.....”

(퍼억!!)

“크억!!!”

순간 왼쪽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나는 몸을 기역자로 꺾으며 옆구리를 마구 비벼서 아픔을 빨리 날려버리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흥. 헛소리 하는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죠.”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 나가는 그녀를 보자니 화가 나서 마음껏 욕을 하고 싶었지만, 방금 전 타격 때문에 못 움직이고 있는 나를 사쿠라 씨와 오토메 누나가 노려보고 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발을 움직여야 했다.

‘신이시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아니, 잘못은 했지만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런 고통을 주는 거냐!!!!!!!!!!!!!!!!’

결국 난 쌓여있던 모든 분노를 마음속에서 신을 향해 표출하는 것으로 이번 일로 생긴 감정을 날려버려야만 했다.

(웅성 웅성)

시선이 따갑다. 솔직한 심정으로 부담된다. 민폐다.

(웅성 웅성)

하지만 그녀들은 절대로 내 곁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부러울지도 모르지만, 난 결코 기쁘지 않다.

“이제 학교가 코앞인데 슬슬 떨어져 주실래요?”

“이제 학교가 코앞인데 왜 그래야 하는데?”

“..............”

오토메 누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들은 나와 함께 등교했다.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에 꽂혀있는 것 같아서 마치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매일 매일 이렇다면 다른 학생들의 시선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다... 어떻게든 해야겠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내일부터는 반드시 혼자서 등교하리라 다짐하는 나였지만, 가슴 한 구석에선 그녀들이 매일 이럴 것이라는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쿠라 씨에게 대충 소속 반에 대해서 들은 후, 민폐녀의 안내를 받아 교실에 도착했다. 사실 오토메 누나의 안내를 받고 싶었지만, 그녀는본교 학생이라 다른 건물에 교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같은 건물인 민폐녀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날 안내하는 것이 싫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내가 귀찮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억지로 그녀의 안내를 받아냈다.

“흠... 여기가 내가 있을 교실이란 말이지.”

교실 문 위에 3-B라고 적혀있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내가 신세를 지게 될 이곳에서, 황당한 일만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문을열었다.

(덜커덩!!)

“...............”

문이 안 열린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뻑뻑하다. 탁하고 막힌 느낌이다. 드르륵하고 열려야 할 문이 열리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다시 문을 열려고 팔을 움직여봤다.

(덜커덩!!)

똑같은 반응. 앞문이 잠겨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면 뒷문으로도 학생들이 들어가고 있으니까. 그 말은 당연히 앞문도 열려 있다는것이다.

등교 첫 날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이 한 몸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

순간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민폐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내가 못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웃고 있을 게 틀림없다. 뒤를 돌아보진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고작 이런 것에 창피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서 되겠는가! 단숨에 열어주겠다!’

라는 생각으로 있는 양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힘껏 문을 옆으로 당겼다.

(덜커덩! 덜커덩!)

“....어째서 안 열리는 거야!!!!!”

포기. 그리고 절규.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폐녀가 곁으로 다가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열리는 문은 저건데요.”

“.....................”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문은 바로 2개의 문 중 ‘열리지 않는 문’. 잘만 열리는 문을 내버려두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했으니, 어지간히 힘이 좋은 사람이 아닌 이상 열릴 리가 없다.

‘어째서 반대쪽 문을 열어볼 생각을 안 한 거지...’

털썩하고 쓰러져 좌절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느껴보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지만 그것보다 민폐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충격이었다.

“풉.”

순간 귀를 강타하는 그녀의 비웃음. 남들은 다 구구단을 하는데 나만 못 해서 욕먹는 것보다 더 슬프다. 평생 씻을 수 없는 굴욕이다.

‘저 녀석이......’

그녀가 잘못 한 것이 없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고, 내봤자 그저 분풀이일 뿐이니까 그것을 꼬투리로 또 놀림을 받을 거고.......이래저래 나만 안 좋은 상황이다.

“그럼 전 이만......”

실컷 즐겼는지 그녀는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난 놓치지 않았다.

‘내 반드시 저 녀석에게 복수하리라. 꼭! 반드시! 절대로!’

어린 아이의 생각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그녀가 굴욕을 느낄만한 사건이 다가오길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아 그래. 내가 이럴 시간이 없지.”

곧 종이 칠 것을 깨달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복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챙겼다. 심호흡을 가볍게 한 뒤, 이번에는 열리는 문을 가볍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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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붙은 은근히 짜증나는 것 같아요 -_-;;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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