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우와............”
도시락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계란말이에 소시지, 브로콜리가 들어 있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부초밥이 몇 개 있었다.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바로 밥이다. 분명히 새하얀 쌀밥인데, 그 위에 케첩으로 하나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잘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은 현실로써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死인가..........”
순백의 평야에 붉은 산맥이 대지를 멋들어지게 갈라놓았는데, 그 붉은 산맥은 흡사 死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死다. 그것 이외엔 떠오르는 게 전혀 없다. 이건 분명히 死란 글자다. 왜 이런 글자가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다.
‘무슨 독극물이라도 들어가 있는 거냐....’
마치 ‘먹고 죽어라.’라는 느낌이 드는 케첩의 위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에 섣불리 음식에 손을 못 대고 있는데, 힐끗 옆을 보니 그녀가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을 관찰하는 사육사처럼 나를 지켜보는 그녀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먹기 시작해야 그녀도 밥을 먹을 것 같다.
‘마치 실험실에 감금당한 실험자가 된 기분이다......혹시 요리에 자신이 없는 건가? 그래서 나에게 테스트를?!’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받아버린 물건, 이대로 다시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인가....’
(꾸르르륵)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위는 계속 음식을 넣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굶주림에 나의 판단력은 점점 흐려졌고, 결국 나는 각오를 다지고 가장 평범해 보이는 계란말이를 일단 먹어보기로 했다.
‘설마 도저히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짜다던가.......그런 건 아니겠지?’
계란말이가 혀에 닫기 0.1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걱정을 했다. 그리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나서 계란말이를 혀 위에 얹고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우물 우물)
“...............으음?”
계란말이의 맛은.......아주 맛있었다.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적절한 맛이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계란말이를 몇 번 만들어봤지만 이 정도로 완벽한 맛은 처음 느껴보았다. 사람의 손으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어때?”
나를 지켜보고 있던 도시락 제공자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은데. 이걸 정말 네가 만든 거야?”
“요리 실력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난 또 대 실패작을 먹게 된 줄 알았잖아.”
“실패작이라곤 단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히죽하고 웃으면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실컷 골려먹다가 끝날 쯤에 풀어주는, 흡사 작은 악마 같았다. 사실 따지면 처음부터 걱정만 한 나의 잘못이지만.
“그럼 고맙게 잘 받아먹겠어.”
다음 타깃은 유부초밥. 어떤 감미로운 맛이 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나의 기대를 한껏 받으면서, 유부초밥은 나의 입에 들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물 우물)
“.................”
“.....................”
“매워!!!!!!!!!!!!!!!!!!!!!!!!!!!!!!!!!!!!!!!!!!!!!!!!!!!!!!!!!!!!!!!!!!!!!!!!!!!!!!!!”
나는 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모두 이쪽을 보게 할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
방금 먹은 내 유부초밥에서 아주 강렬한 겨자의 맛을 느꼈다. 아니, 이건 그냥 겨자로만 양념을 한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다!! 아니!! 이건 그냥 겨자덩어리다!! 살인 무기다!!
“......겨자를 실수로 너무 많이 넣어버린 유부초밥이 있으니까 조심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민폐녀와 마찬가지로 이 ‘작은 악마’에게 꼭 복수하겠다고.
(딩- 동- 댕- 동-)
드디어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이 지루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집에 돌아가면 사쿠라 씨의 잔소리를 또 들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것 보다는 그쪽이 더 좋다고 생각 되었다.
“저기, 세이토 군.”
뒤에서 코토리가 날 불렀다. 가방을 싸던 것을 멈추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시야엔 곧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난 그녀를 보곤 한마디 했다.
“군도 빼. 왠지 거북하니까.”
“그래? 그럼 세이토.”
“왜?”
“세이토는 부활동이라던가 할 생각 없어?”
“부활동이라....”
나는 잠시 예전 세계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전 세계에선 동아리에 들어갈 정도로 활발하게 뭔가 해본 기억은 없다. 부활동을 하면 그만큼 자유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혼자서 이것저것 해보길 좋아하는 나에게는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쎄. 난 혼자서 행동하는 타입이라서 말이지.”
난 별로 내키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코토리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 아쉽네. 세이토에게 매니저 역할을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응? 왠 매니저? 역시 연예인 쪽으로 진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친구들과 취미삼아 밴드를 하고 있는데, 와서 공연을 해달라는 곳이 있어서 말이야. 밴드 연습하랴, 일정 관리하랴, 이래저래 힘들거든.”
“호오. 그 정도로 코토리의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아니, 아니, 그렇진 않아.”
코토리는 웃으면서 내 말을 부정했지만, 난 그녀를 보면서 확신했다. 코토리가 보컬로 들어가 있는 밴드라면, 나머지 사람들의 실력이 충분하다면 대성할 게 틀림없다고. 왜 그녀가 그쪽으로 갈 생각을 안 하는지 나로선 의문이다. 예전 세계에서는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에게도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일까.
“미안하지만 난 내 일정도 관리를 못 하는 남자라서 말이지. 타인의 일정까지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아니야. 내가 괜히 무리하게 부탁한 것 같아서 미안해.”
“미안할 건 없지. 그냥 권유한 것뿐이니까.”
“그런가? 뭐 그럼 그렇다고 치지 뭐.”
항상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난 같은 반이 된 코토리에게 감사했다.
난 원래 타인들과 잘 섞이는 편이 아니라서 솔직히 이렇게 빨리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거라곤 상상하지 못 했다. 비록 한 명 뿐이지만 등교 첫날부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밴드 연습?”
내 말에 코토리는 고개를 저었다. 매일같이 연습을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쇼핑.”
“같이 밴드를 하는?”
“응.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줄게.”
“뭐, 내키면.”
“그럼 난 이제 가볼게. 친구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코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고, 나도 돌아갈 준비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응. 조심해서 돌아가.”
그녀는 교실을 나가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고, 난 적당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음....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할 건 없을 테니까, 교내를 좀 돌아다녀 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방을 들고 교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내부 구조를 알기 위해서 1층 현관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곳까지 가면서 지나치는 교실들에는 청소를 하거나 잡담을 떠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설마 내가 중학교 생활을 다시 할 줄이야. 그리운 모습들이다...’
일단 나도 예전 세계에서는 대학생이란 존재였으니 여러 가지 추억이란 것이 있다.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선생님께 걸려 크게 혼이 났던 기억이라던가, 친구들과 당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교했던 기억이라던가, 한밤중에 학교에 몰래 숨어 들어와 담력테스트를 하던 기억이라던가.
“그나저나 중학교 내용이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예전에 공부 좀 많이 해둘걸.”
라고 생각을 해보지만 그것은 과거, 지금 내가 중학교 과정을 다시 배우는 입장이라는 것은 현실. 후회해도 너무 늦었다. 다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후회라던가 늦었다던가가 통하지 않지만.
“오. 도착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사이에 난 1층 현관에 도착했고, 별 어려움 없이 학교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알림판을 찾을 수 있었다.
“음.....오늘은 도서실에 잠시 가볼까.”
부활동을 할 생각이 없으니 동아리 방에 갈 이유는 없고, 음악실이나 과학실 등에도 갈 이유가 없다. 그런 소거법으로 하나 둘 제거하다보니 남은 건 도서실이었다.
“뭐, 흥미로운 책이 있다면 좀 읽다가 오면 되겠지.”
목적지가 결정되자, 나의 걸음을 빨라졌다. 평소 이동시에 내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목적지까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힘 낭비가 많아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습관이 들어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왜 도서실이 3층에 있는 거야....”
알다시피 난 방금 전까지 1층에 있었다. 그러나 도서실은 3학년 교실이 있는 3층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난 다시 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손해면 손해지 절대로 이득은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토리에게 위치 같은 건 미리 물어둘걸...”
정확하고 친절한 설명서가 자기 근처에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버스가 오는 정거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지금 나의 경우는 후자다.
“좋아...다 도착했다...”
‘기회가 되면 사쿠라 씨에게 건의를 해야겠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기계들을 두기엔 카자미 학원은 그리 큰 편은 아니라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한번쯤은 건의를 해봄직한 사항이라고 생각한 나는 언젠가 사쿠라 씨에게 말을 꺼내기로 다짐했다.
“드디어 도착인가...”
계단에게 온갖 불평을 다 보내면서 걸어온 결과, 도서실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디보자....지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난 도서실 문 앞에서 머리를 굴려 지금까지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서실에서 보낼 시간을 도출해냈다.
“좋아. 일단 30분정도는 있어보자. 여기엔 어떤 재미있는 책들이 날 반겨줄까. 기대되는데.”
본디 책을 장시간 읽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30분이면 적절하다고 생각한 나는 이곳에만 있는 특이한 책이 날 반겨줄 것을 기대하며 도서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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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까지 썼는데... 아직도 3화나 더 올려야 하는군... =-=;;
-세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