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점심시간은 찾아왔다. 오늘은 평범하게 혼자서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도시락은 내키지 않으니 이번엔 패스.

‘아....오늘은 행복한 식사 시간이 될 것 같아....’

며칠 만에 찾아온 평화일까. 그 어떤 일에도 얽히지 않고 혼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내일은 다른 사람과 먹어도 아무런 불평을 안 할 테니까, 제발 이 평화를 만끽하게 해주세요!’

라고 신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나였다.

.

.

.

.

.

“아니, 그러니까 말이지?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머리카락이 약간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 분다. 이 따뜻한 날씨와 아주 잘 맞는다. 그런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난 따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학생식당이 아니다. 건물 내부에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카자미 학원 내부에 있는 어떤 잔디 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잔디에 놓인 돗자리 위. 그리고 내 주변엔 남학생 2명과 여학생 3명이 있다. 나를 포함해 6인 그룹이라는 말.

“.......뭔데?”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작은 악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 화가 났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이득이 없다는 것쯤은 이제 알 것 같다.

“물론 식사는 여러 명이서 하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여전히 ‘난 아무것도 몰라요.’란 표정이다. 화가 나지만 忍, 忍, 忍이다. 세 번 참으면 복이 온다고도 하지 않은가? 힘들지만 꾹 참는 것이 답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정도는 혼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어.”

“그래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특별히 대답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그 반응에 난 의욕이고 거부고 뭐고 모두 사라졌다. 더 이야기 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다. 기브업.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재미없는 남자.”

이 작은 악마는 내가 포기하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끝나자마자 히죽 웃으면서 승리의 V를 보였다.

‘뭔가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과연 내가 이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패배감과 허무함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내 시야에 들어오는 5명의 학생들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채로 있어야 했다.

학생식당에서 평화를 만끽하려고 했던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했냐는 점심시간이 시작할 때의 교실로 돌아 가야한다.

.

.

.

.

.

“으음.......어디보자.......”

기지개를 피면서 느긋하게 무라사키와 코토리의 행동을 살폈다. 식사를 하려는 것뿐인데 왠지 그녀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좀 씁쓸했지만, 그래야만 내가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흠......그렇단 말이지.....’

다행히 그녀들이 나를 방해할 것 같은 낌새는 없었고, 마음이 놓인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디 학생식당으로 가볼까?’

그렇게 느긋하게 학생식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사쿠라이.”

내 옆에 앉아 있던 작은 악마, 유키무라 안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가만히 유키무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눈살이 살짝 찌푸렸다.

“....대답은?”

‘이 녀석을 체크하지 않은 건 실수군...’

이런 일에까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슬퍼지는 나였다.

“묵비권?”

“아니 그런 건 아닌데.................왜 부른 거야?”

처음부터 바로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녀의 부름에 움직임을 멈춘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났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의 대화를 시작한다.’라는 선택지를 선택했다. 게임이었다면 세이브한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겠지만 그건 게임이고, 이건 현실이다.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

“거절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녀가 날 불러 세운 이유를 안 순간,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 내 대답을 들은 유키무라는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같이 먹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즉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모처럼 제대로 만든 음식을 먹게 해주려고 했는데.”

“보나마나 또 겨자를 넣은 음식이 있겠지. 아니면 극한의 짠맛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라던가.”

“....내 신용도가 그렇게 낮아?”

“‘내 안에서’는 말이지.”

“흐음.....”

불만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키무라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뭔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장소를 벗어날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그럼 난 이.......”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

고개를 돌리며 한 발 때려는 순간, 유키무라는 그 자세 그대로 나직이 무언가를 말했고, 그녀가 한 말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말이 만약 잘못 들린 거라면, 난 또다시 절호의 찬스를 노친 것이다.

“.........뭐라고?”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유키무라를 봤다. 그녀는 웃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젠장. 난 정말 이 녀석한테 이길 수 없는 거냐.’

“하아............”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내 포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른 편이다. 내 마음과 뇌엔 이미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란 지울 수 없는 말이 박혀버렸다. 할 수 없이 오늘 있을 ‘즐거운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끌리긴 끌리나 보네?”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가 왠지 모르게 미웠다. 특히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저 모습이, 저 웃음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녀석과 얽히게 된 걸까.

‘....하긴. 다 자업자득이겠군.’

처음 그녀의 도시락을 받아먹은 것도 나였고, 도서관에서 말을 먼저 건 것도 나다. 모든 걸 포기한 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누구라도 ‘초호화’란 단어가 들으면 순간적으로 반응을 하게 될 거야.”

“그렇겠지. 그걸 노리고 말한 거니까.”

“.....알고 있으면 묻질 말던가.”

“그 편이 더 재미있잖아?”

나와 대화를 하는 게 언제나 승부인지, 이번에도 그녀는 가볍게 승리의 V사인을 보이며 말했다. 그것에 대한 태클을 걸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그래서? 교실에서 먹는 건가?”

“아니.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 거야.”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1인분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조금 큰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런 말, 한 기억도 없어.”

내 질문에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교실을 나갔고, 모든 걸 포기한 난 천천히 그녀를 뒤따라갔다.

.

.

.

.

.

그렇게 난 이유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끌려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배고프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질렸다’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다만 유키무라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서로 말하는 게 정상 아닐까?”

“아니, 나도 그건 알고 있지만........배고픈 건 사실이라고. 실제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유키무라의 말에 바로 대답을 했다. 내 대답에 그녀는 특유의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붙잡은 적 없는데?”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이 녀석과 싸우면 항상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데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심히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라 이쪽에서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자기소개정도는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난 사쿠라이 세이토. 3-B.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지금 있으니까 오늘 하루 잘 부탁해.”

난 앉은 채로 고개를 살짝 꾸벅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내 앞에 있는 2명의 여학생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지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녀들이라고 뭘 알 수 있겠는가.

“난 이타바시 와타루라고 해! 잘 부탁한다!”

갑자기 내 왼쪽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내 등을 강하게 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 맞은 나는 화가 나서 그 녀석을 노려봤다.

“지금 시비 거는 거냐?”

“하하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뜻이니까 그렇게 너무 정색하지 마!”

이타바시란 남학생은 다시 한 번 내 등을 치면서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모르겠지만, 크고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이타바시는 웃고 있다. 같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난 그의 당돌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풋. 너 이상한 녀석이구나.”

그 친근감은 결국 웃음이라는 것으로 발전했고, 기분이 완전히 풀린 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타바시는 천성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유키무라가 옆에서 보충 설명을 해줬다. 적당히 이해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뭔가 강요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빨리 밥을 먹고 싶은 이쪽 심정도 이해해줬으면 했다.

한 명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연분홍색의 머리색이었다. 머리를 일부 앞쪽으로 두고 있는데, 끝부분이 롤 헤어 형식처럼 약간 말려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생각보다 가슴이 크군.....’

그렇다. 그녀는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유키무라와는 달리 존재감이 너무 있는 가슴을 소유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거유란 게 바로 저런 걸까.

“........그렇게 사쿠라이는 아카네의 가슴에 매료되었다.”

옆에서 지긋이 날 보고 있던 유키무라가 내레이션 같은 말투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내레이션 말투냐.”

“......부정하지 않는다?”

“보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매료되진 않았어.”

내 말에 두 여학생의 몸이 살짝 움직였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봤는데도 매료되지 않았다고? 저렇게 큰 가슴에?”

유키무라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하면 내가 나쁜 사람으로 취급될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보는 것도 안 되냐.”

“요즘은 보는 것만으로도 성희롱이 적용되는 세상이라서 말이지.”

“도대체 어떻게 된 세상인거냐 여긴.”

우리들의 대화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고, 대화가 끝나자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대상자 쪽으로 향했다.

“....에.....그러니까.....아하하.”

당사자는 조금 당황한 듯 웃기 시작했다. 자기소개 차례가 그녀에게 넘어간 것 같지만,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점심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만 같아서 난 그녀를 독촉하기로 했다.

“가슴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이름이라도 좀 알고 싶은데.”

“......라면서 작업을 걸기 시작하는 그였다.”

“그러니까 그 말투 좀 그만하라고.”

유키무라는 또다시 내레이션 말투로 말했고, 난 거기에 자연스럽게 태클을 걸어버렸다. 이러다가 그녀와 함께 만담꾼이 되는 게 아닐까.

“아, 미안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그녀였다.

“내 이름은 하나사키 아카네야. 잘 부탁해.”

“자, 다음.”

난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그 다음으로 하나사키의 옆에 앉아 있는 여학생을 봤다.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연갈색의 머리색이었다.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위쪽으로 뻗어 나와 흡사 안테나 같은 모습을 띄며, 또 다른 일부분은 별도로 묶어서 측면으로 튀어나도록 해두었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이라 그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찾기 편리할 것 같았다.

그녀도 하나사키 못지않게 가슴이 좀 컸지만, 계속 봤다간 유키무라가 또 그것으로 한마디 할 것 같아서 시선은 얼굴에 고정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인 걸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아!! 내....내 이름은 츠.....츠키시마 코콧!! #%$$%#!!!!”

‘씹었군.’

긴장을 했는지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 혀를 씹은 것 같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유키무라가 한마디 했다.

“사쿠라이는 코코같은 사람을 주로 노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이봐.”

유키무라는 정말 가만히 놔뒀다간 뭘 할지 모르는 녀석이다. 그런 그녀와 함께 친구로 있는 그들이 내심 존경스러웠다.

“얘 이름은 츠키시마 코코야. 미안해. 긴장을 좀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아니 그냥 이름을 물어본 건데 그렇게 긴장할 것까진 없잖아.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난 마지막으로 이타바시의 옆에 앉아서 가만히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학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비공식 신문부에 들 생각이 있는가?”

“뭐야 그건.”

사쿠라 씨나 오토메 누나, 코토리를 통해 카자미 학원 내의 동아리에 대해서 대충 들었는데, 그런 이름의 동아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 듣는 이름이 살짝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후후후........들어오고 싶은가?”

눈을 지그시 감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사기꾼’이라던가 ‘위험한 사람’이란 오오라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와 얽히게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보다 더 심한 문제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사양하마.”

“흠. 그런가. 아쉽군. 동지여.”

“그러니까 동지로 만들지 말라고.”

아무래도 이 녀석은 마이페이스인 것 같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유키무라처럼 내가 태클을 걸어야 한다는 점도 상당히 피곤할 것 같다.

‘하아...두 번 같이 식사했다간 내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난 유키무라와 얽히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다짐했다. 다음엔 반드시 딱 잘라서 거절하겠다고.

------------------------------------------------------------

<세이토의 후기>

드디어 20화!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9화>

다음 날.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코토리에게 내 휴대폰의 존재를 알리고, 번호와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래?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쉽게 연락할 수 있겠네?”

코토리는 흔쾌히 나에게 번호와 주소를 알려줬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번호를 저장했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끝났을 때 1교시가 시작되었다.

 

 

“후아암.........”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창문 밖 풍경을 감상했다. 보이는 건 건물들과 벚꽃나무, 하늘정도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되겠군. 이젠 슬슬 지겨워지는데....'

어제도 수업은 안 듣고 창밖을 보기만 했다. 이곳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은 일단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뭐 사실 그것도 다 변명이겠지만.’

저런 생각들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내 머리와 몸은 따로 놀고 있으니까.

“그럼..........사쿠라이. 다음을 읽어봐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지목되었다. 물론 그 수업도 전혀 안 듣고 있었기 때문에 지목된 이유는 모른다.

“어............음..........”

“음? 혹시 자고 있었다던가?”

“자고 있던 건 아닙니다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선생님은 내가 수업을 듣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하셨다.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보면 말하셨다.

“알고 있겠죠?”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그 어떤 변명도, 반론도 하지 않고 바로 교실에서 나왔다. 이 선생님의 벌은 매우 간단했다. 잠을 자다가 걸리면 운동장 5바퀴, 딴 짓을 하다가 걸리면 운동장 3바퀴. 내 경우는 후자이기 때문에 난 운동장 3바퀴를 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동장 달리기가 벌이라니.....”

이런 말을 하면 좀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벌은 생전 처음이다. 예전 세계에선 맞는 것으로 끝내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이 체벌에 대해서 들었을 땐 조금 황당했지만, 이젠 그럭저럭 즐기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아......하아......"

물론 재미가 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재미는......하아......있는데....하아....지친다.......”

이건 여담이지만, 난 체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지쳤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앉은 채로 책상에 쓰러졌다. 체력이 좋지 않은 나에겐 운동장 3바퀴도 충분히 큰 벌이었다.

“그러게 왜 수업을 안 듣는 거야......”

내 뒤에 있던 코토리가 안쓰럽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난 엎드려있는 상태로 대답을 했다.

“지루하니까 그렇잖아. 재미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수업.”

“학생의 본업은 공부니까 싫더라도 해야지.”

“학생이라........”

왠지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갑자기 중학생이 된 자신의 현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양쪽 다 ‘학생’이긴 하지만, 너무 낮아진 자신의 처지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응?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코토리가 갑자기 웃는 나를 보고 궁금해 했지만,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녀도 딱히 큰 관심은 없는지 더 깊게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럼 점심을 같이 먹지 않을래?”

“음? 벌써 점심시간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봤다. 방금 전 수업이 끝나고 막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난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말했다.

“아, 벌써 점심시간이군. 오늘 하루도 빨리 흘러가네.”

“세이토가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아니, 그건 아니지. 창밖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을 뿐이니까. 시간이 빨리 흘러간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어쨌든, 어때? 같이 점심을 먹을래?”

“난 도시락 안 가져왔는데.”

전에 사쿠라 씨에게 도시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사쿠라 씨가 ‘능력이 되면 스스로 만들어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셨기 때문에 귀찮다는 이유로 도시락을 만들지 않았다. ‘학생식당이라는 편리한 장소가 있는데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야 하느냐.’가 바로 내 생각이다.

내 말을 들은 코토리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건 괜찮아. 오늘은 나도 학생식당이거든.”

“그래? 그럼 상관없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코토리와 함께 교실을 나와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학생식당으로 가는 도중,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들의 이유가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코토리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번에 공원에서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난 이곳에 입학하기 전에 코토리와 만났던 벚꽃 공원에서의 일을 기억했다. 그때도 우리가 앉아 있던 벤치 근처를 지나가는 남자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것을 느꼈었다.

그때는 코토리와 이야기를 하느라 크게 신경을 안 썼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 꽤나 신경 쓰였다. 할 수 없이 이번에도 그녀와 뭔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점심을 먹는 친구들이 있지 않았나?”

내가 본 코토리는 점심시간에 다른 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오늘도 당연히 그 친구들과 함께 먹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코토리 쪽에서 먼저 점심 식사를 권유해서 조금 놀랐었다.

“아 그거? 뭐...........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말끝을 흐리는 코토리에게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로 중요하다곤 생각되지 않아서 넘어갔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끊겨버렸고, 어색한 침묵이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난 말하는 타입이 아니라 듣는 타입인데....’

대화라는 것은 누군가 화제를 꺼내고, 상대방이 그 화제에 대한 리액션을 취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건 물론이고, 화제를 꺼내지 않으면 대화를 시도하지도 못한다.

‘딱히 언제나 화제를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침묵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왠지 모르게 살기도 느껴졌지만, 그냥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코토리는 역시 도시락 파?”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고, 화제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파’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일단 도시락을 주로 싸오는 편이야.”

“도시락을 매일같이 싸오는 거, 귀찮지 않아?”

난 어떻게든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코토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어차피 자신이 먹는 거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고 있어.”

“흠....역시 그런가.....”

코토리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직접 도시락을 만들면 원하는 반찬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고, 영양 밸런스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여자 아이의 경우 다이어트 문제로 먹는 양을 조절할 수도 있다.

“세이토는 요리를 할 수 있었던가?”

코토리는 역으로 나에게 물어왔고, 난 자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조금이라면?”

“그럼 다음에 도시락을 만들어 와. 같이 먹자.”

“뭐...........내키면?”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자니 도시락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드는 과정은 귀찮지만, 마지막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내 시원찮은 대답을 들은 코토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그때가 되면 꼭 말해줘. 친구들도 불러서 같이 먹게.”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순간 강한 살기가 여러 곳에서 느껴졌다. 난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가......가능하면 적은 인원수로 먹는 게 편한데.”

“그래? 점심을 같이 먹는 친구는 2명인데, 괜찮지?”

나와 코토리를 합치면 4명. 그 정도면 나도 크게 부담되진 않는다. 코토리의 친구라고 하면 여학생일게 분명하니까. 여담이지만, 난 여자가 서툴다.

“뭐.....그 정도라면 괜찮겠지.”

“응! 세이토의 도시락, 기대할게.”

활짝 웃으면서 말하는 코토리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 남학생들의 질투의 시선을 느꼈다.

‘아니, 그런 눈빛을 보내봤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있다는 기쁨과 남학생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부담 때문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던 코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

그들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는 걸음속도를 높였고, 코토리도 나를 따라오기 위해 조금 빨리 걷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학생식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겠지만, 그곳에 가면 식사에 집중할 수 있다. 그것이라면 내 집중력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쾅!!!!]


그리고 나의 그런 믿음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또 저 녀석이야....왜 자꾸 얽히는 거야.....”

보는 사람만 없었다면 난 아마 좌절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리카 무라사키. 전에 식권 판매기에 1만 엔을 넣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그녀가 또 문제를 일으켰다.

".....무라사키 씨지? 괜찮을까? 판매기를 발로 찼는데...."

‘그냥 내버려 두고 싶어.....’

그렇다. 그녀는 내가 학생식당에 들어오는 타이밍에 식권 판매기를 발로 찬 것이다. 가서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식권 판매기가 고장 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걸 발로 차겠는가?

“신, 네 녀석.....”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하려는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안 준다.’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생식당에 온 이상 나는 식권 판매기를 이용해야만 하고, 그 식권 판매기 앞에 에리카 무라사키가 있는 것이다. 난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에게 불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무라사키의 외침이 들린다. 화가 나있는지 그녀는 숨이 조금 거칠었다. 그런 그녀를 보니 더더욱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하아....”

“어떻게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라사키를 보고 있는 코토리의 말에 난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단은 같은 반이기 때문에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말이지 얼마나 폐를 끼쳐야 속이 시원한 거야 저 녀석.”

나는 한숨을 쉬면서 무라사키 쪽으로 걸어갔고, 코토리는 내 뒤를 따라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다. 무라사키는 우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깨닫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넌 또 왜 끼어드는 거야!!”

‘.....나도 싫다니깐.’

무라사키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방금 전 그녀가 식권 판매기를 발로 찬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이번에도 저것과 관계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번에도 1만 엔을 넣은 거냐?”

“아니야!!!!”

즉답이다. 그녀를 조금 과소평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건 사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만 내가 편하다. 나도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선 해결이 안 될 것 같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해봐. 나도 이 식권 판매기를 써야한다고.”

씩씩거리던 무라사키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돈은 분명히 넣었는데, 식권이 안 나와!”

여전히 화가 잔뜩 나있는 상태로.

“버튼을 누른 건 확실해?”

“당연하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음.......건방진 공주님?’

입 밖에 냈다간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난 천천히 식권 판매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계산은 끝났는지 잔돈이 나와 있었고, 식권만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식권만 안 나온 것을 보곤 난 뭔가가 떠올랐다.

“분명히 간혹 가다가 식권 판매기가 반응이 느려져서 식권이 늦게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나가는 투로 들었기 때문에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식권이 늦게 나와서 고장 난 줄 알았다는 학생의 말.

‘....라는 건,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결과가 나온단 말?’

난 식권이 나오는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한 곳만 바라보자 화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무라사키도 아무 말 없이 식권 배출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툭]

"어. 나왔다."

“오오오오.....”

“나왔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곧 식권이 하나 나왔다. 그러자 주변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 식권을 무라사키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식권을 받았다.

“하아. 이걸로 또 한 건 해결이군........”

끝났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쉰 그 순간.

 

[툭]

 

“..........”

식권이 하나 더 나왔다. 난 그 식권을 바라보면서 무라사키에게 물었다.

“너, 혹시 식권 여러 개 샀냐?”

“그럴 리가. 하나밖에 안 샀어.”

“................”

 

[툭]

 

식권 한 장이 또 나왔다.

‘이......이건 위험할지도.’

그제서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다. 난 위험을 깨닫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응?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무라사키가 이쪽으로 오더니 가볍게 식권 판매기를 발로 찼다.

“아!! 그걸 차면!!”

“응? 그게 뭐 어ㄸ.......에에에에에에!?!?!?!!!?”

 

[툭툭툭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방금 전 충격으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식권 판매기는 식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까 내가 학생식당에 들어 왔을 때 무라사키가 식권 판매기를 찬 것으로 인해, 식권 판매기가 고장 나서 식권을 마구 뽑아내는 것이다!!

“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결국 나와 무라사키는 식당 아주머니께 크게 혼났고, 뒷정리를 하느라 밥을 먹지 못했다.

-------------------------------------------------------

백업백업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8화>

그날 저녁.

이번엔 저녁을 요시노 가에서 먹기로 했다. 물론 아사쿠라 가 사람들과 함께.

요리는 나와 오토메 누나가 함께 만들었다. 메뉴는 평범한 일식. 내가 요리를 어느 정도 할 수는 있지만, 잘하는 편은 아니라 오토메 누나의 서포터 역할을 맡았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들었는데, 오토메 누나의 동생인 아사쿠라 유메는 요리를 전혀 못 한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들어와서 기뻐한 나는 그것을 자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대충 저녁식사 준비가 끝났고, 나와 오토메 누나가 음식들을 거실로 옮겨왔다. 우리는 다다미방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아니, 차분한 저녁 식사가 되길 바랬다.

“그러고 보니 세이토는 말이야.”

“응?”

식사가 시작 된지 몇 분 후, 오토메 누나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 따라 나는 자동적으로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녀를 봐야 했다.

“부활동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는 거야?”

코토리가 전에 교실에서 나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 때 코토리에게 대답을 했었지만,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별로 끌리진 않는데.”

“그럼 학생회에 들어오지 않을래?”

“음?”

그녀의 권유가 학생회라는 점에서 조금 놀랐지만, 바로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해봤다. 학생회에 들어가서 내가 이득을 보는 게 뭐가 있을지, 뭐가 나와 안 맞을지. 그리고 곧 결론을 냈다.

“...왠지 이것저것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싫어.”

“그런 말 하지 말고~ 같이 학생회 활동하면서 내가 이것저것 알려줄게. 하츠네 섬에 대해서라던가, 학생의 마음가짐이라던가.”

‘학생의 마음가짐’이란 부분이 조금 궁금했지만, 그것 때문에 학생회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난 정중히 거절하기로 했다.

“하츠네 섬에 대해서 물어볼 사람이야 있으니까 오토메 누나가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응? 벌써 친구가 생긴 거야?”

방금 한 내 말에 오토메 누나뿐만 아니라 사쿠라 씨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아사쿠라 유메만이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고, 쥰이치 씨는 ‘호오-’라며 조금은 흥미가 있다는 모습을 보였다. 사쿠라 씨는 ‘학교에 처음 간 자식이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니까 흥미가 생긴 부모’같은 느낌? 뭐 지금 상황에서 보면 사쿠라 씨와 나의 관계는 부모자식관계라고 봐도 될 정도지만.

다만 거기에 대해서 내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식사를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렇다고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그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법, 할 수 없이 난 식사를 멈추고 그들에게 말해줬다.

“사쿠라 씨에겐 말한 적이 있을 거 에요. 시라카와 코토리라고 저랑 내기를 했던.”

“아아, 그 아이?”

사쿠라 씨는 저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셨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이다. 특히 오토메 누나는 큰 관심을 보이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시라카와? 그 시라카와 씨?”

“‘그’라는 게 누굴 가리키는지 모르겠는데.”

“붉은색의 생머리에 미인이고 노래를 잘 부른다고 소문이 난 그 시라카와 씨?”

“뭐......맞는 것 같은데.”

‘근데 지금 난 밥을 먹고 싶다고...’

난 지금 배가 고프다.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식사를 멈추면서까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흥미 가득한 표정의 오토메 누나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밥을 다 먹게 되는 건 한참 후가 될 것 같다.

“세이토가 그 시라카와 씨와........”

“....뭔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이라고?”

순간 오토메 누나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나 오토메 누나에겐 내 말이 도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어디까지 간 거야?”

“...그냥 아는 사이니까 착각은 거기까지 해줬으면 좋겠어.”

“어? 애인 관계가 아닌 거야?”

“방금 아니라고 말했잖아...”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오토메 누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더니 실망했는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기나 했더니..”

“나는 이야기보따리가 아니야.”

그렇게 이 이야기는 끝이 나고, 느긋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말이지.”

....라고 말하고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내 뜻대로 될 리가 없다.

“세이토는 지금 애인 없는 거야?”

“없어. 내가 이 세......가 아니라 하츠네 섬에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애인이야.”

“그럼 하츠네 섬에 오기 전에는?”

“..........없어.”

좀 더 따지자면, 이전 세계에서 연락을 주고받는 여성은 전혀 없다. 그 점이 왠지 모르게 슬펐지만, 스스로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갔다.

“성격을 조금만 바꾸면 충분히 인기가 있을 것 같은데....”

“뭐........나도 애인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딱히 당장 필요하진 않고...”

이제 적당히 대화를 끝내고 밥을 다시 먹으려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는 순간, 오토메 누나가 내 쪽으로 몸을 들이대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세이토의 애인이 되어줄까?”

“.........................”

오토메 누나의 갑작스런 발언에 젓가락을 잡고 있던 오른손가락이 순간 움찔해서 젓가락이 떨어졌고, 왼손에 들고 있는 밥그릇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내 착각이 아니라면 아사쿠라 유메가 방금 그 말을 듣고 움찔거렸다.

난 천천히 흘린 밥과 그릇을 정리한 다음에 그녀를 보았다. 오토메 누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진심이야?”

“한 70%정도?”

여전히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방금 그 말이 진심이라곤 생각이 되지 않았다. 내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는 조금 화가 났는지 불만을 표했다.

“뭐야, 지금 이 누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대답했다. 농담이라면 농담으로 끝날 이야기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면 조금 곤란하다.

‘물론 기쁘긴 한데, 이렇게 스트레이트는 좀....’

나는 진정하고 냉정하게 생각을 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아직 아는 것도 제대로 없는 저 오토메 누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론은 의외로 빨리 나왔다.

“왠지 오토메 누나의 애인이 되면 죄를 짓는 것 같으니 거절할게.”

“뭐야 그게~ 좀 더 그럴싸한 이유는 없는 거야?”

“아니,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고...”

솔직한 심정을 말했지만 아무래도 대충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오토메 누나는 볼을 잔뜩 부풀리면서 화를 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찬스.

“자, 이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밥 좀 먹자. 이야기만 하다가 배고파 쓰러지겠어.”

그렇게 강제로 이야기를 종료시키고, 난 재빨리 밥을 먹었다. 그러자 오토메 누나도 포기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사쿠라 유메에게서 ‘언니에게 손을 댄다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라는 말을 들었지만, 별로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아무래도 아사쿠라 유메와는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첫 만남이 최악이라서 그런지, 지금보다 관계를 좋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저녁 식사 후, 아사쿠라 가 사람들은 간단히 과자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실에는 나와 사쿠라 씨만이 남았다.

“아 그래.”

사쿠라 씨는 갑자기 뭔가 기억이 났다는 듯이 방으로 잠시 가시더니, 상자를 하나 들고 오셨다.

“뭔가요 이건?”

“네가 앞으로 쓸 핸드폰.”

“아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필요했었죠...”

나는 사쿠라 씨에게서 상자를 받아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충전기, 몇 종류의 핸드폰 줄, 설명서와 내 핸드폰이 담겨져 있었다.

“음. 폴더형이군요.”

열고 닫는 형식이라 이름 붙은 폴더형 핸드폰. 예전 세계에서 쓰던 핸드폰도 폴더형이었기 때문에, 내 맘에 쏙 들었다.

“색상은 괜찮아?”

“네. 전 색상을 따지는 편이 아니라 상관없어요.”

전체적으로 색상은 군청색이고, 적절히 붙어 있어야할 버튼은 붙어있고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하는 버튼들은 조금 거리가 있게 되어 있는 구성이었다. 예전 세계의 핸드폰은 종료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빈번해서 고생이 많았는데, 이번엔 그런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핸드폰을 살피는 나를 지켜보던 사쿠라 씨는 혹여나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것 같다. 물론 내가 그녀에게 하는 말은...

“딱 좋은데요. 예전에 쓰던 것보다 더 편할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다~ 혹시나 싫어하면 바꾸러 가야하니까 귀찮아지니까 말이지~”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사쿠라 씨는 안심했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셨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사쿠라 씨의 미소엔 마법이라도 걸려있는지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사쿠라 씨는 핸드폰 가지고 계시나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좀 우습지만, 이 사람이라면 핸드폰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쿠라 씨의 볼이 살짝 부풀어지더니,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말투로 말하셨다.

“날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뭐....이미지가 좀 그렇다고 할까....”

“나도 내 휴대폰이 있어! 얕보지 마!”

“아니, 얕본 건 아닌데...”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는데 사쿠라 씨가 가볍게 손바닥으로 나의 이마를 치셨다.

“아얏.”

“이건 날 얕본 벌이야.”

“....네.”

이런 면에선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면 또 혼나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살짝 웃음이 나왔다.

“아, 지금 날 비웃는 거야?”

“아니, 아니. 비웃지 않았습니다.”

“수상한데......”

수상한 사람을 바라보는듯한 사쿠라 씨의 시선이 괴로웠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럼 번호랑 메일 주소를 알려주세요. 저장해두게.”

“이미 저장되어 있어.”

“.....빠르시네요.”

“어차피 나중에 저장할거고, 핸드폰이 잘 되는지 확인해봐야 하니까 샀을 때 바로 저장했지.”

‘에헴!’하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사쿠라 씨는 정말 어린아이 같았다.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럼 전 이제 슬슬 자러 가볼게요.”

“아, 참고로 오빠랑 오토메, 유메의 번호랑 메일 주소도 저장해뒀어.”

“.....남의 핸드폰에 그렇게 마음대로...”

“우리가 남이야?”

순간 사쿠라 씨의 싸늘한 표정이 보여 흠칫한 난 90도로 몸을 숙여 사죄했다.

“아닙니다.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음! 잘했어.”

사쿠라 씨는 그런 나를 보면서 방긋 웃으시더니, 손으로 가볍게 내 머리를 어루만지셨다. 나는 다시 사쿠라 씨께 인사를 한 다음에,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뒤 책상 의자에 앉아서 폰을 만지작거렸다.

“핸드폰이라.....”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핸드폰. 이전 세계에선 시계 or 간혹 오는 연락용으로 썼기 때문에 이곳에선 어떻게 쓰일지 앞날이 걱정되었다.

[띠링~]

“...응?”

갑자기 핸드폰에서 소리가 나기에 열어봤는데,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누가 보낸 거지? 사쿠라 씨인가? 아니면 광고 메일?”

궁금해진 나는 버튼을 눌러서 내용을 확인해봤다.

[제목 : 핸드폰 생겼다며~]

[안녕~ 아까 저녁 준비하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시간 절약이 되었어. 그리고 핸드폰 생긴 거 축하해~ -아사쿠라 오토메-]

오토메 누나가 보낸 메일이었다. 내 핸드폰의 존재나 메일 주소는 사쿠라 씨를 통해서 알아냈음이 틀림없다. 사쿠라 씨가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어디보자...답장을 보내는 방법이....”

예전 세계에선 메일을 자주 썼던 것이 아니라서 핸드폰을 처음 조작하는 어르신들처럼 좀 힘겹게 조작을 해서 답장을 보냈다.

[제목 : 감사합니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세이토-]

“짧게 보내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써먹겠나.”

나는 휴대폰을 침대로 집어 던졌다가 오토메 누나의 답장 때문에 침대까지 가서 핸드폰을 다시 가져왔다. 그 후 오토메 누나와 몇 번 메일을 주고받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내일 코토리에게 번호와 메일 주소를 알아내 궁금한 것이 생기면 물어보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나 혼자의 생각이지만.

심심해서 사쿠라 씨에게 메일을 보내봤는데 이런 걸로 장난치면 안 된다고 방에서 정좌를 하고 혼났다는 것과 아사쿠라 유메에게 예의상 메일을 보냈는데 ‘변태’라고 답장이 와서 메일로 격하게 싸웠다는 건 또 다른 에피소드다.

---------------------------------------------------------------

19화를 언제 적을진 모르겠지만....

뭐 언젠간 완결내겠죠. (머엉)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7화>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쿠라 씨가 돌아오자마자 내 방에 있는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필요한 테이블을 시작해서 침대도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사쿠라 씨가 침대만큼은 치울 수 없다고 하셨기에 절충안으로 테이블 만이라도 치우기로 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대만족이다.

“그래!! 바로 이 모습이야!!!”

넓어진 방의 모습을 보고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방 중앙에 있는 테이블 때문에 꽉 막힌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시원스럽게 뻥 뚫려있는 것 같다.

“이얍.”

그 모습에 만족한 난 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스프링의 반동을 느끼며 누운 다음, 천장을 보면서 차분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잊고 싶지 않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유는 아니고, 그냥 시간 때우기다.

“어디보자....오늘 있었던 일들이....”

첫 번째. 교실 앞문에서의 해프닝. 앞문을 열려고 하는데 열리지 않는 문을 가지고 원맨쇼.

“하필이면 그 녀석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별로 얽히고 싶지 않는 사람과 연관되는 일이 있으면, 꽤나 기분이 나쁘다. 교실 문에서의 해프닝이 바로 그것이다. 하필이면 아사쿠라 유메라는 민폐녀 앞에서 그런 일이....

“아니야.....분명히 나에게도 찬스가 올 거야....그 녀석 눈앞에서 신나게 웃어줄 그 날이...”

라고 말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것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두 번째. 코토리와의 재회. 시라카와 코토리라는 미소녀와 같은 반이라는 것. 다행이 이쪽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빨리 적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이.....”

세 번째. 유키무라 안즈의 도시락. 생각만 해도 강력한 겨자의 맛이 입안에 퍼지는 것 같다. 생각도 하기 싫다.

“.....그냥 넘어가자 그건.”

그 뒤로 도서실에서 있었던 유키무라와의 대화, 하교 길에 보았던 벚꽃나무들의 멋진 풍경 등 오늘 하루 있었던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음. 그......뭐더라.......”

아직 나는 사회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 한 마디는 하고 싶다.

‘누가 저 선생 좀 어떻게 해봐!!!!!’

학창시절이랄까........일단 예전 세계에 있을 때의 이야기로,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모두 평범했다. 친구들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 듣다보면 괴짜 선생도 있고 열혈 선생도 있는 것에 반해, 난 평범한 선생님밖에 보지 못 했다. 어떤 면에선 운이 나쁜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쪽이 나에겐 더 편했다.

어쨌든 그런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내가 이쪽 세계에서 처음 본 선생은.............

“아 그래. 전학생이 오늘부터 온다고 했던가.”

‘너무 대충이잖아!!!!!’

모든 것을 대충 처리하는 남자였다.

“이름이 뭐였더라......기억이 잘 안 나네.”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 저 선생을 보면서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만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답답해 보인다.

“아 모르겠다. 이봐. 이제 들어와.”

결국 이름을 기억 못했는지, 적당한 호칭을 사용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앞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오오....”

“이햐.......”

교실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림이 보였고, 곳곳에서 남학생들의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여학생이었다.

‘호오....금발이라.....’

금발의 여성이라면 사쿠라 씨를 빼면 이쪽 세계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뭐 머리색이 어떠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아직 코토리 이외엔 반 아이들과 친해지지 않은 내 입장에선 외모보다 성격이 더 중요하다.

“뭐 대충 알아서 자기소개를 해라.”

‘당신, 담임이잖아!!!!’

자기도 모르게 태클을 걸어버리게 된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구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에헴.”

교실 앞쪽에서 담임 옆에 서 있는 여학생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모았다. 교실이 적당히 조용해지자 그녀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후 뒤로 돌아서 우리들을 보면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에리카. 에리카 무라사키라고 합니다.”

‘에리카 무라사키........외국인인가?’

성이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외국인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되는 그녀의 자기소개에 그것이 언급되었다.

“이름을 듣고 아시겠지만, 전 외국인이고 이번에 이쪽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것으로 그녀의 자기소개는 끝났다. 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있던 담임은 자기소개가 끝나자 이런 말을 한 마디하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앉고 싶은 자리에 마음대로 앉아. 누가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나저나, 이 타이밍에 전학생이라니....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는 기분이군..’

담임의 말에 반 아이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 했고, 난 별로 관심이 없어서 뭔가 꺼림칙스러워서 잠시 생각을 가지기로 했다. 생각을 하다 보니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까부터 보고 있던 무라사키 쪽으로 고정되었는데, 교실 주변을 좀 둘러보던 무라사키는 이쪽을 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응?”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반 아이들의 관심도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혹시............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오는 건 아니겠지?’

나에게 있어선 창가는 명당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자리만큼은 내줄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조금 긴장했다.

“야.”

“뭐야.”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반말을 하는 그녀에게 나도 반말로 대답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꽂혔지만, 그녀는 그러든지 말든지 내 앞에 도착한 후 조금 화가 나 있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

(철썩!)

오자마자 뭐라고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기에, 내 쪽에서 먼저 말을 하기로 하고 입을 열었는데, 말을 하던 도중에 그녀가 한 행동 때문에 내 말이 끊겼다.

“꺄아!! 세이토!! 괜찮아!?”

일순간 반이 소란스러워졌다. 내 뒤에서 코토리가 깜작 놀라면서 말하는데, 솔직히 나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 알고 있는 건 지금 내 뺨이 얼얼하다는 것과 고개가 조금 움직였던 것 정도?

‘.......뭐지?’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나는 무라사키를 보기 위해서 고개를 움직였다.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여전히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도 지금 상황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뭐.......”

(철썩!!)

말을 다시 하려고 했는데 방금 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어떤 행위가 반복되면 사람은 인식이란 것을 하게 된다. 특히 나의 경우는 어떤 일이 반복되어야만 인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 세계에선 둔감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건 둘째 치고,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다.

‘나......맞은 거야?!’

그렇다. 난 뺨을 맞은 것이다. 에리카 무라사키란 여학생에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뺨을 두 번이나 맞았다는 건 사실이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 거지?!!?’

맞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 이 상황이 되기까지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그녀를 보고만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건방지게 어딜 쳐다봐.”

“...................응?”

그녀가 한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서....설마.....’

“네가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내가 계속 널 보고 있어서 화가 났다는 건 아니겠지?”

“어라. 잘 알고 있네.”

“................”

일순간 교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무슨 생각이 이렇담?! 자기가 무슨 공주라도 되나보지?!’

객관적으로 보면, 내 잘못은 없다. 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게 잘못일 리가 없다. 타인이 자신을 보고 있어서 기분이 나쁘다고 때리는 게 잘하는 짓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보기만 해도 죄냐!!”

“당연하지!!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고! 이 변태!!”

‘변태’란 단어에 발끈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보며 소리쳤다.

“변태라고 부르지 마 이 공주병아!!”

“고...공주병이라니!! 무례하긴!!”

“무례고 나발이고 다짜고짜 뺨을 때린 녀석이 뭐가 잘났다고 소리치는 거야!!”

“그러는 넌 뭐가 잘났는데!! 이 변태야!!”

“변태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아아아아아!!!!!!!”

결국 우리들의 싸움은, 첫 수업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무라사키는 창가가 좋다면서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았는데, 그녀의 뒷모습조차 보기 싫은 내 입장에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특히 매 쉬는 시간마다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위해서 달려드는 남학생들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점심시간. 드디어 1차 해방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몸 안에서 막혀있던 무언가가 뻥 뚫린 기분이다. 나는 공주병과 얽히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학생식당으로 갔다. 어제 사쿠라 씨에게 오늘 점심값은 받아왔기 때문에 돈 걱정은 없다.

“역시 혼자서 움직이는 게 편해....”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코토리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권유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보다 혼자서 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어디보자....식권을 사려면..........아, 저기 기계가 있군.”

식권을 파는 곳이 안 보여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에, 식권 판매기가 있는 것을 알아냈다. 즐거움 마음에 곧바로 식권 판매기 쪽으로 걸어갔는데............

“뭐야 이건. 왜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내가 먼저 교실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저 녀석이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은 바로 첫 만남이 엉망이었던 공주병, 에리카 무라사키였다. 그녀는 식권 판매기 앞에 서 있으면서 불만을 계속해서 토해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식권 판매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혹은 그녀가 식권 판매기를 이용할 줄 모른다거나.

‘별로 얽히고 싶진 않지만 저 녀석이 이대로 계속 있으면 내가 식권을 못 사니까 어쩔 수 없나....’

구경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안 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고 나선,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

판매기에게 화를 잔뜩 내고 있던 그녀는 내가 말을 걸자 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판매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따윈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나도 너에게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의 내 행동에 방해가 되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혹시 식권 판매기를 이용할 줄 모르는 거 아니냐?”

나의 말에 그녀는 순간 흠칫했다. 정곡을 찌른 것 같다.

“호오. 역시 그런 거였군.”

“그......그럴 리가 없잖아?! 나...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순간 당황했는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 게 실제로 있는 일이구나.’

예전 세계에서는 당황하면 오히려 정색을 하고 부정을 하던데, 이쪽 세계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렇다고 치고, 뭐가 문제인데.”

“.....................”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하아........”

“뭐....뭐야! 그 한숨은!”

“솔직히 말해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나도 식권 판매기를 이용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너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 늦어지는 건 사양한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인지 말해.”

“그.........그러니까.......”

“그러니까?”

“사......사용법을 몰라.”

그녀는 양 볼이 살짝 붉어지면서 부끄러워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목적을 위해서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다.

“돈은 넣었어?”

“넣었어.”

“얼마나?”

“......1만 엔?”

“아니, 나를 보면서 물어봐도.”

나는 식권 판매기를 보았다. 판매기는 현재 자신이 1만 엔을 받았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뭐야! 그렇다고 웃을 건 없잖아!”

“아니 뭐 그렇다고 치고, 무슨 단체 예약도 아닌데 1만 엔이나 넣을 필요가 있나?”

“....지갑에 그것밖에 없었는걸.”

“아 그러냐.”

나는 버튼을 눌러 1만 엔을 다시 꺼내 그녀에게 돌려준 뒤, 주머니에 있던 천 엔짜리 지폐 한 장을 판매기에 넣은 다음에 그녀에게 물어봤다.

“뭘 먹을 거야.”

“........응?”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했는지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갑에 만 엔밖에 없다면서. 아쉽게도 이 기계는 그렇게 큰돈은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 같네. 그냥 내가 사줄 테니까 하나 골라.”

“.....어째서?”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꾸 머뭇거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금 답답했다. 그래서 난 이유를 말해주기로 했다.

“첫째, 이미 난 돈을 넣었다. 둘째, 내가 먹고 싶은 걸 선택해도 돈이 남기 때문에 겸사겸사. 셋째, 너 때문에 뒤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이 아직 식권을 못 샀잖아. 네가 이대로 있으면 그들이 밥을 못 먹는다고.”

“.................”

“그래서?”

“저...정식A.”

겨우 결정을 한 그녀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쉰 다음에 난 판매기에 있는 버튼 중에서 정식A를 찾았다. 정식A 버튼엔 400엔이라는 가격이 적혀 있었다. 잘 살펴보니 판매기에 있는 음식들의 가격은 대부분 그 정도였다.

“그럼 나도 이걸로 할까.”

정식A 버튼을 두 번 눌러 식권 2개를 받고 잔돈 200엔을 챙긴 다음에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무라사키도 나를 따라 나왔고, 그제야 다른 학생들이 식권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하아.......귀찮아 죽겠네.”

이런 일에 연관되는 건 예전 세계에서는 좀처럼 없었던 거라서, 평소보다 몇 배로 피곤한 것 같다.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자. 식권.”

나는 식권을 무라사키에게 준 다음에 재빨리 음식을 받으러 갔다. 그 때 뒤에서 무라사키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지만, 배가 고프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던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

드디어 17화!!

랄까 17화나 되었는데 진도가... -_-;;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6화>

(드르륵)

다행이 이번엔 열리는 문을 제대로 선택해 열었다. 여기서도 그런 해프닝이 일어나는 건 사양이다.

“음.....평범한 모습이군.”

문을 열고 보이는 것은 많은 책장과 테이블이었다. 먼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너머로 책장들이 보였다. 입구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꺾으면 책의 대여와 반납을 담당하고 있는 카운터가 있었다.

“방과 후라 그런지 학생들이 적군....아니, 오히려 많아야 하는 시간대가 아닌가?”

도서실의 이용 목적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대학생 시절에는 필요한 자료는 도서관에서 모두 찾았기에 텅텅 비어있는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대학교와 중학교를 비교한다는 것부터 잘못이었지만.

“그럼 얌전히 읽을거리나 찾으러 가볼.....응?”

책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중, 창가 쪽 테이블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저 녀석은 분명히 점심시간의........”

내 눈에 들어온 그 사람은 바로 점심시간에 나에게 겨자 100% 유부초밥이 들어있는 도시락을 준 녀석이었다. 작지만 남들보다 몇 배로 위험한 여학생.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모르는군. 이참에 통성명이나 해둘까.”

겨자 100% 유부초밥 이외엔 문제되는 것이 없어서,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점심을 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인사를 안 했기에 겸사겸사 감사의 말을 전하기로 했다.

“...........”

“..............”

그녀는 손에는 연필을 들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 펼쳐둔 공책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부? 아니면 뭔가 구상하고 있는 걸까?’

저 멀리 있는 물건이 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는 심정이라고 할까?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의 호기심은 더욱 증가했고, 내 걸음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응?”

내가 그녀로부터 1m 이내의 거리에 도달하자, 그녀는 그제야 나의 접근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그쪽은 분명히......”

“여어.”

일단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와 대화할 의사를 보였다.

“무슨 일이야?”

“잠시 시간을 때우려고 왔는데, 네가 보여서 말이지.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나 하려고.”

그런데 그녀는 나의 말을 듣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딱히 개그를 펼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다.

“왜 웃는 거야?”

“겨자덩어리를 먹인 사람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일부러 먹인 거냐?”

“글쎄~?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

히죽 웃는 그녀의 얼굴에선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로 여러 가지 해프닝과 고통을 느꼈던 나다. 이 정도로 기죽진 않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도시락은 고마웠어.”

“살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겨자 100% 유부초밥을 먹고 호의를 느끼진 않으니까 걱정 마.”

“그럼 됐고.”

그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공책 쪽으로 숙이곤 하던 일을 계속 했다.

“............”

“............”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공책에 뭔가를 적어 보기도 하더니, 곧 그것을 지우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다.

“............”

“............”

의외로 테이블이 넓어서 공책의 내용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쓰고 지우는 것만 보인다.

“...............”

“...............”

심심하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게 전부라서 지루함이 몰려왔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도서실에 온 목적이긴 했지만, 아직 수정된 내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

“................”

이쪽에서 말을 걸어야 할지, 저쪽에서 말을 걸어주는 걸 기다릴지 생각을 해봤지만, 어느 쪽도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순간엔 우물쭈물한다는 것이 예전의 내 단점이었고, 그 단점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계속 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계속 있어봤자 지루하고 피곤한 건 나 뿐.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난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이름........”

“.......응?”

“이름을 알려주지 않을래?”

내가 말을 하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다. 그래서 난 다시 한 번 말했다.

“너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감사의 인사를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왕 이렇게 알게 된 거 이름이라도 알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어.”

“.....그래서, 지금 나에게 작업을 거는 거란 말이야?”

“아니,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작업을 걸고 있다고 밖에 생각이 안 되는 걸?”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 강력한 한마디를 날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뭐 그런 건 알아서 생각하고. 어때? 간단히 통성명을 할까하는데.”

“뭐.....내키긴 않지만 특별히 알려주도록 할게.”

‘...이 녀석, 반드시 복수한다!!’

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나였다.

“내 이름은 유키무라 안즈. 알고 있다시피 너랑 같은 3-B 소속.”

“난 사쿠라이 세이토. 아쉽게도 너와 같은 3-B군.”

“.......사쿠라이?”

“응?”

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유키무라는 ‘사쿠라이’에 순간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갑자기 반응을 하자 이유를 모르는 나는

“왜 그래? 사쿠라이가 뭐 어때서?”

“아니.......”

그녀는 뭔가 곰곰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이름인데...’라고 말하면서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처럼.

“왜 그래?”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 같은데.........기억이 나지 않아.”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거 아니야? 난 그런 편인데.”

“미안하지만 난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을 수 있거든.”

“아 그러셔.”

순간 그녀가 약간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 것 같다. 적어도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다곤 생각되지 않아서 그냥 흘러 넘겼다.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봐선, 아무것도 아닌가보지 뭐.”

유키무라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공책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젠 책을 가지러 가는 것이 귀찮아져서, 나는 그냥 유키무라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비밀.”

“공부는 아닌 것 같은데......”

“할 일이 없으면 그냥 집에 돌아가지 그래?”

별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여성과의 대화를 꺼리는 내가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이상하게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부터 나에게 작업을 거시겠다고?”

“어째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야....”

“이 상황에선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상황인데 대화를 하고 있으면 차분해지니 마니하고 말하고 있으니까.”

여전히 공책을 바라보며 이쪽은 봐주지 않는 그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려고 할 때 허공을 보고 말하면 느낌이 묘하니깐.

“뭐....그건 그런가?”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응?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그녀가 뭐라고 말한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이 무엇일지 처음엔 궁금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에 그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거......재미있어?”

“.......그다지?”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데, 뭘 하고 있는지 알려주면 좀 안 되려나?”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공책을 덮었다. 그리곤 나를 보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방해돼.”

“......미안.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 집중이 안 될 것 같으니까, 돌아갈래.”

라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실을 나갔다.

“음....역시 민폐인가?”

그 순간 나는 코토리가 나에게 한 말을 기억해냈다.

[사쿠라이 군은 여성을 대하는 태도나 매너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

“.................”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고, 딱히 누군가가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해준 적도 없다. 그렇기에 코토리가 나에게 해준 말은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진지하게 생각했었다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흥미를 끄는 책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도 이젠 귀찮아졌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지.”

나는 의자를 넣고 터벅터벅 도서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교실 문에서의 해프닝과 코토리와 같은 반이 된 것, 그리고 유키무라 안즈와의 만남이 오늘 있었던 경험들이다. 코토리와 같은 반이 된 것 말고는 그다지 좋은 경험이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

평균 한글프로그램 7~8쪽에 한 화를 적으려고 노력하는데

머리가 안 굴러가면 좀 힘들군요. 저만큼 적어내기 (얼마 안 되는데도 말이죠)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5화>

“우와............”

도시락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계란말이에 소시지, 브로콜리가 들어 있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부초밥이 몇 개 있었다.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바로 밥이다. 분명히 새하얀 쌀밥인데, 그 위에 케첩으로 하나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잘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은 현실로써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死인가..........”

순백의 평야에 붉은 산맥이 대지를 멋들어지게 갈라놓았는데, 그 붉은 산맥은 흡사 死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死다. 그것 이외엔 떠오르는 게 전혀 없다. 이건 분명히 死란 글자다. 왜 이런 글자가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다.

‘무슨 독극물이라도 들어가 있는 거냐....’

마치 ‘먹고 죽어라.’라는 느낌이 드는 케첩의 위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에 섣불리 음식에 손을 못 대고 있는데, 힐끗 옆을 보니 그녀가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을 관찰하는 사육사처럼 나를 지켜보는 그녀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먹기 시작해야 그녀도 밥을 먹을 것 같다.

‘마치 실험실에 감금당한 실험자가 된 기분이다......혹시 요리에 자신이 없는 건가? 그래서 나에게 테스트를?!’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받아버린 물건, 이대로 다시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인가....’

(꾸르르륵)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위는 계속 음식을 넣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굶주림에 나의 판단력은 점점 흐려졌고, 결국 나는 각오를 다지고 가장 평범해 보이는 계란말이를 일단 먹어보기로 했다.

‘설마 도저히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짜다던가.......그런 건 아니겠지?’

계란말이가 혀에 닫기 0.1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걱정을 했다. 그리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나서 계란말이를 혀 위에 얹고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우물 우물)

“...............으음?”

계란말이의 맛은.......아주 맛있었다.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적절한 맛이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계란말이를 몇 번 만들어봤지만 이 정도로 완벽한 맛은 처음 느껴보았다. 사람의 손으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어때?”

나를 지켜보고 있던 도시락 제공자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은데. 이걸 정말 네가 만든 거야?”

“요리 실력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난 또 대 실패작을 먹게 된 줄 알았잖아.”

“실패작이라곤 단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히죽하고 웃으면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실컷 골려먹다가 끝날 쯤에 풀어주는, 흡사 작은 악마 같았다. 사실 따지면 처음부터 걱정만 한 나의 잘못이지만.

“그럼 고맙게 잘 받아먹겠어.”

다음 타깃은 유부초밥. 어떤 감미로운 맛이 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나의 기대를 한껏 받으면서, 유부초밥은 나의 입에 들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물 우물)

“.................”

“.....................”

“매워!!!!!!!!!!!!!!!!!!!!!!!!!!!!!!!!!!!!!!!!!!!!!!!!!!!!!!!!!!!!!!!!!!!!!!!!!!!!!!!!”

나는 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모두 이쪽을 보게 할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

방금 먹은 내 유부초밥에서 아주 강렬한 겨자의 맛을 느꼈다. 아니, 이건 그냥 겨자로만 양념을 한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다!! 아니!! 이건 그냥 겨자덩어리다!! 살인 무기다!!

“......겨자를 실수로 너무 많이 넣어버린 유부초밥이 있으니까 조심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민폐녀와 마찬가지로 이 ‘작은 악마’에게 꼭 복수하겠다고.

(딩- 동- 댕- 동-)

드디어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이 지루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집에 돌아가면 사쿠라 씨의 잔소리를 또 들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것 보다는 그쪽이 더 좋다고 생각 되었다.

“저기, 세이토 군.”

뒤에서 코토리가 날 불렀다. 가방을 싸던 것을 멈추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시야엔 곧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난 그녀를 보곤 한마디 했다.

“군도 빼. 왠지 거북하니까.”

“그래? 그럼 세이토.”

“왜?”

“세이토는 부활동이라던가 할 생각 없어?”

“부활동이라....”

나는 잠시 예전 세계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전 세계에선 동아리에 들어갈 정도로 활발하게 뭔가 해본 기억은 없다. 부활동을 하면 그만큼 자유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혼자서 이것저것 해보길 좋아하는 나에게는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쎄. 난 혼자서 행동하는 타입이라서 말이지.”

난 별로 내키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코토리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 아쉽네. 세이토에게 매니저 역할을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응? 왠 매니저? 역시 연예인 쪽으로 진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친구들과 취미삼아 밴드를 하고 있는데, 와서 공연을 해달라는 곳이 있어서 말이야. 밴드 연습하랴, 일정 관리하랴, 이래저래 힘들거든.”

“호오. 그 정도로 코토리의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아니, 아니, 그렇진 않아.”

코토리는 웃으면서 내 말을 부정했지만, 난 그녀를 보면서 확신했다. 코토리가 보컬로 들어가 있는 밴드라면, 나머지 사람들의 실력이 충분하다면 대성할 게 틀림없다고. 왜 그녀가 그쪽으로 갈 생각을 안 하는지 나로선 의문이다. 예전 세계에서는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에게도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일까.

“미안하지만 난 내 일정도 관리를 못 하는 남자라서 말이지. 타인의 일정까지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아니야. 내가 괜히 무리하게 부탁한 것 같아서 미안해.”

“미안할 건 없지. 그냥 권유한 것뿐이니까.”

“그런가? 뭐 그럼 그렇다고 치지 뭐.”

항상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난 같은 반이 된 코토리에게 감사했다.

난 원래 타인들과 잘 섞이는 편이 아니라서 솔직히 이렇게 빨리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거라곤 상상하지 못 했다. 비록 한 명 뿐이지만 등교 첫날부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밴드 연습?”

내 말에 코토리는 고개를 저었다. 매일같이 연습을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쇼핑.”

“같이 밴드를 하는?”

“응.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줄게.”

“뭐, 내키면.”

“그럼 난 이제 가볼게. 친구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코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고, 나도 돌아갈 준비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응. 조심해서 돌아가.”

그녀는 교실을 나가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고, 난 적당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음....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할 건 없을 테니까, 교내를 좀 돌아다녀 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방을 들고 교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내부 구조를 알기 위해서 1층 현관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곳까지 가면서 지나치는 교실들에는 청소를 하거나 잡담을 떠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설마 내가 중학교 생활을 다시 할 줄이야. 그리운 모습들이다...’

일단 나도 예전 세계에서는 대학생이란 존재였으니 여러 가지 추억이란 것이 있다.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선생님께 걸려 크게 혼이 났던 기억이라던가, 친구들과 당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교했던 기억이라던가, 한밤중에 학교에 몰래 숨어 들어와 담력테스트를 하던 기억이라던가.

“그나저나 중학교 내용이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예전에 공부 좀 많이 해둘걸.”

라고 생각을 해보지만 그것은 과거, 지금 내가 중학교 과정을 다시 배우는 입장이라는 것은 현실. 후회해도 너무 늦었다. 다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후회라던가 늦었다던가가 통하지 않지만.

“오. 도착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사이에 난 1층 현관에 도착했고, 별 어려움 없이 학교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알림판을 찾을 수 있었다.

“음.....오늘은 도서실에 잠시 가볼까.”

부활동을 할 생각이 없으니 동아리 방에 갈 이유는 없고, 음악실이나 과학실 등에도 갈 이유가 없다. 그런 소거법으로 하나 둘 제거하다보니 남은 건 도서실이었다.

“뭐, 흥미로운 책이 있다면 좀 읽다가 오면 되겠지.”

목적지가 결정되자, 나의 걸음을 빨라졌다. 평소 이동시에 내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목적지까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힘 낭비가 많아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습관이 들어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왜 도서실이 3층에 있는 거야....”

알다시피 난 방금 전까지 1층에 있었다. 그러나 도서실은 3학년 교실이 있는 3층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난 다시 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손해면 손해지 절대로 이득은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토리에게 위치 같은 건 미리 물어둘걸...”

정확하고 친절한 설명서가 자기 근처에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버스가 오는 정거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지금 나의 경우는 후자다.

“좋아...다 도착했다...”

‘기회가 되면 사쿠라 씨에게 건의를 해야겠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기계들을 두기엔 카자미 학원은 그리 큰 편은 아니라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한번쯤은 건의를 해봄직한 사항이라고 생각한 나는 언젠가 사쿠라 씨에게 말을 꺼내기로 다짐했다.

“드디어 도착인가...”

계단에게 온갖 불평을 다 보내면서 걸어온 결과, 도서실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디보자....지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난 도서실 문 앞에서 머리를 굴려 지금까지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서실에서 보낼 시간을 도출해냈다.

“좋아. 일단 30분정도는 있어보자. 여기엔 어떤 재미있는 책들이 날 반겨줄까. 기대되는데.”

본디 책을 장시간 읽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30분이면 적절하다고 생각한 나는 이곳에만 있는 특이한 책이 날 반겨줄 것을 기대하며 도서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

18화까지 썼는데... 아직도 3화나 더 올려야 하는군... =-=;;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4화>

(드르륵)

시원스럽게 열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살며시 감으며 가슴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고작 이거 하나 보자고 그 고생을 한 거냐....’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해프닝이 일어나니 정신적으로 너무 지칠 것만 같다.

‘수업 시간엔 잠을 좀 자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내 정신력이 못 버틸 것 같다...’

라며 눈을 떴는데....

“..............”

“...............”

모든 이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문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고, 내 뒤에 누군가 서 있어 그 사람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있었던 덜커덩 사건으로 보아, 아무래도 내가 이 상황의 주인공인 것 같다.

‘아....시선이 따갑다....’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 하는 상황에서 나는 간신히 눈을 굴려 교실을 살폈다. 처음 보는 나를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고, 별로 반기지 않는 표정도 보였다. 특히 남학생들 사이에서 나를 싫어하는 눈치가 잘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서 안식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라며 한숨을 쉬던 그 때

“아! 사쿠라이 군이다!”

갑자기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그 목시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으엑?!”

“‘으엑?!’이라니. 너무하잖아......”

한 번 만난 것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되는..............은 너무 심했고, 어쨌든 보기 드문 미소녀인 시라카와 코토리가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나랑 같은 반이었어?!”

손을 흔들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루 동안 못 봤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다.

“여......여어.”

“‘여어.’가 아니잖아? 어제는 왜 안 나온 거야?”

“응?! 어떻게 네가 그걸 알고 있어?!”

깜짝 놀라는 나를 보며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대답했다.

“어제는 전체 조회가 있었어. 학원장이 특별히 전교생 앞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것 같던데 네가 없어서 정말이지 난리도 아니었어.”

“.....무슨 생각인 거야 그 사람은.”

그녀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사쿠라 씨는 당시 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조회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화를 냈다고 한다. 만약 어제 내가 결석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있었을 것 같아, 무단결석을 한 것을 스스로에게 고마워했다.

“어쨌든, 어제 사쿠라이 군이 오지 않았으니 내기는 내가 이긴 거지?”

“.......그래. 내가졌다.”

“근데 어째서 오지 않았던 거야?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 거야?”

라며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 이마에 올렸다. 갑자기 따뜻한 손의 감촉이 느껴져 조금 놀라긴 했지만 별 거 아니라서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주변에서 원망의 눈길이 나에게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너희들의 그 마음, 내가 이해는 한다만 그건 너희들이 인연이 없다는 증거야.’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나는 그녀가 손을 땔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곧 그녀는 손을 이마에서 때면서 말했다.

“음...열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네.”

“당연하지. 얼굴이 멀쩡하잖아.”

“겉은 멀쩡하고 속은 엉망일 수도 있으니깐.”

그녀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한 마디 해주려고 했던 나는 그녀가 웃으면서 말하자 그럴 마음이 날아가 버렸다. 비겁하다면 비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같은 반이라면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지? 그곳이 내 자리겠지 뭐.”

“응. 바로 내 앞자리야.”

‘아니, 나를 노려봐도 자리는 안 바꿔 주니까.’

내 자리가 그녀의 앞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 교실 내 남성들은 살벌하게 나를 노려봤지만, 창가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선 시라카와 코토리란 미소녀가 내 근처에 앉아 있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 세계에서도 항상 창가에 자리를 잡았었고, 밖을 바라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편이라 교수님에게 많이 혼났었지만, 그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창가를 반가워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난 내 자리로 돌아가서 창밖과 책상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창가란 말이지..... 명당이라서 다행이네.”

“어때? 내가 근처에 있어서 기쁘지 않아?”

“응?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건데? 난 그저 창가가 좋을 뿐인데?”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보단 좋지 않아?”

“글쎄다. 난 아웃......이 아니라 원래 혼자서 행동하는 타입이라.”

하마터면 예전 세계에서 쓰던 단어를 꺼낼 뻔했지만 재빨리 적당한 표현으로 바꿔서 대답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딱히 집요하게 물어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하나.”

“응?”

“성으로 부르는 건 썩 내키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그냥 세이토라고 불러줘.”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나 자신이 ‘사쿠라이’라고 불리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친한 사람들에게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이쪽은 예전 그대로니 별로 위화감이 없을 테니까.

“음....그럼 나도 코토리라고 불러도 좋아.”

“응? 아니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만 이름으로 부르면 재미없잖아?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해.”

“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저기 나를 노려보는 녀석들의 시선이 부담된다.’

내가 조건 없이 그녀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에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분위기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앞으로 내가 고생을 좀 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휴.......집이나 이곳이나 편한 곳이 없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코토리도 나를 따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들이 자리에 앉자 우리들을 보고 있던 학생들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갔다.

수업은 평범했다. 비록 놀고먹는 대학생이었지만 나도 나름의 지식이 있었고 그것을 잃지 않고 이쪽 세계로 넘어왔기 때문에, 수업에서 뒤처지지 않았고 평소처럼 창밖을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었다. 생각이라고 해봤자 별 거 아닌 것들이지만 시간을 보내기엔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

어느 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나는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아. 나 돈이 없지.”

그렇다. 난 아직까지도 사쿠라 씨에게서 돈을 받지 않았다. 모든 걸 사쿠라 씨가 준비해줬다 보니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카자미 학원은 배식제가 아니라 도시락을 싸오든, 학생식당에서 식권을 사든,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먹든, 자신의 사비로 해결해야만 했다.

“굶으면서 오후를 버틸 순 없고.... 어쩐다?”

사쿠라 씨나 오토메 누나를 찾아가는 건 포기했다.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당연히 물어물어 가야할 테고, 그것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난 귀차니즘과 배고픔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귀차니즘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민폐녀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 그녀석이 도와줄 리가 없고.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음......역시 사쿠라 씨한테 가야하나...”

코토리는 선약이 있어서 교실에서 나간 지 오래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 건 무리.

이대로 굶을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들 중에서 가장 속편한 선택지는 바로 사쿠라 씨에게 가서 돈을 받아오는 것. 타인에게 돈을 빌리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누가 공짜로 주면 또 모를까.

“...............”

사쿠라 씨에게 갈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여학생이 보였다.

“...............”

“................”

그녀는 롤 헤어를 하고 있었고 남색의 커다란 리본으로 새하얀 머리를 묶어두고 있었다. 키는 꽤 작아보여서 귀여움이 잘 느껴지는 어린 동물 같았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녀 또한 코토리나 오토메 누나에 뒤지지 않을 한 미모 하는 사람이었다. 조금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따뜻한 사람일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를 지긋이 보고 있는 그녀의 책상에는 연 파란색의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가 있었다. 크기나 형태로 보건데 저것은 도시락이다.

“..............”

“................”

나나 그녀나 서로를 쳐다볼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뭔가 저쪽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기다려 봐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말을 걸기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응?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데.”

“아, 그래?”

“응.”

살짝 웃어 보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나를 비웃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

“................”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된 침묵. 솔직히 좀 거북하다. 이렇게 그녀를 보고만 있는 것으로 배가 부른다면 얼마든지 보고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니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먹을래?”

“응?”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멍하니 있던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 했다.

“.....뭐라고?”

“먹을래?”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있는 물건을 내 쪽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저것이 먹을 것이란 건 확실 한 것 같다. 하지만 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그건 네 몫이 아니었나?”

“실수로 2인분을 싸버렸거든. 버릴 수도 없어서 일단 들고 오긴 했는데 어떻게 처리할 지 고민 중이었거든.”

“흠. 그렇단 말이지.....”

“마침 배는 고픈데 돈이 없어 보여서 너라면 먹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틀려?”

“아니, 일단 배도 고프고 돈도 없는 건 맞지만........”

“맞지만?”

내가 바로 받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가 바로 받아먹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는 눈치다. 물론 나도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바로 받아서 먹고 싶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나한테 어째서 이런 걸?”

“난 2인분을 먹을 만큼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야. 돈 낭비도 하고 싶지 않으니 불우한 이웃을 도우려고 한 것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도시락을 내 쪽으로 내밀었고, 나는 일단 그것을 받기로 했다.

“고마워. 답례는 나중에 하지.”

“.........후훗.”

“...............”

순간 그녀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것 같다. 순간 흠칫했지만, 다시 보니 아까 전의 차가운 느낌이 조금 드는 표정이었다.

‘착각인가...?’

굶주림 때문에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빨리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치는 위를 위해서 서둘러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

복붙을 하고 나면 한글이 안 쳐지는 딜레이 현상이.. ㄱ-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3화>

그렇게 맞이한 다음 날. 결전의 날이다.

부스스 일어난 나는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도중에 계단에서 발을 삐끗해 구를 뻔 했지만, 순간적인 발 조작으로 아침부터 고통에 몸부림치는 해프닝을 막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작 더 큰 해프닝을 못 막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

“아.”

화장실 문을 연 순간, 반쯤 떠 있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사쿠라 씨였다. 단순히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려는 사쿠라 씨와 만났다.’라는 스토리는 괜찮다. 허용범위다. 하지만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아직 이용 중이던 사쿠라 씨와 만났다.’라는 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해프닝이다.

“............”

“............”

깜짝 놀란 사쿠라 씨의 표정은 상당히 귀여웠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외형은 일단 어리니 표현은 이쪽이 더 걸맞다.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거지만.

“............”

“...실례했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사쿠라 씨가 나온 그 후가 두려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그 물을 다시 담을 능력이 없다. 그냥 죽도록 사죄할 뿐.

그 후 밥을 먹고 교복을 입은 후 집에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사쿠라 씨의 질책은 끊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내가 카자미 학원의 위치가 어디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쫓기는 기분으로 집을 나왔을까.

허겁지겁 밥을 먹어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했으며 위치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귀차니즘을 자극했고, 결국 나는 그 날 무단결석을 했다. ‘될 대로 되라.’가 쓸데없이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섬을 돌아다니면서 지리를 익히다가 저녁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쿠라 씨가 화가 많이 난 표정으로 날 맞이하셨다. 물론 나를 보자마자 하시는 첫 마디는

“어째서 오지 않은 거야!!!”

...였다.

“하아.................”

따뜻한 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 전체로 퍼지는 따뜻함이 어제 오늘 쌓였던 피로를 한 방에 날려 보냈다. 자취를 하던 예전 세계에서는 샤워는 자주 했어도 목욕은 자주 하지 않았었다. 돈을 아끼겠다는 것이 1순위 이유였고, 대중탕까지 가는 게 귀찮다는 게 0순위였다. 이 집에는 욕실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할 때마다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역시 매일 사용하면 수도세가 장난 아닐 텐데.......”

여기서 돈을 버는 입장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사쿠라 씨가 말하셨지만, 얹혀사는 입장인데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다. 적당히 적응이 되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저녁도 먹었고, 학교는 결석을 했으니 숙제 같은 건 나에겐 없고......자기 전까지 뭘 하지?”

자기 전까지 비어있는 시간동안 뭘 할지가 걱정이었다. 거실에 가서 TV를 보는 건 사쿠라 씨가 무서워서 무리고, 그렇다고 방에서 뭔가 하자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섬을 돌아다니면서 상점가에 있는 책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들을 구경하긴 했지만, 돈이 없어서 사오지 않았기 때문에 독서를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교과서를 읽는 짓은 안 한다.

“근데 뭔가 하나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뭔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기억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사소하다고 느꼈던 건 금방 잊고 마는데, 지금 잊고 있다고 생각되는 무언가가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누구랑 약속을 잡았던 것 같기도 한데................응? 약속?”

‘약속’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그 단어는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속 맴돌던 그 단어는 조금씩 형태가 변하더니, 결국엔 ‘내기’란 단어로 변해버렸다.

“...................아!!!!!!!!!!!!!!!!!!!!!!!!!!!!!!!!!!!!!!!!!!!!!!!!!!!!!!!!!!!!!!!!!”

난 순간 옆집에서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욕실이라서 그런지 나의 외침은 아주 뚜렷하고 크게 들렸다.

“코토리와 내기를 했었지..... 왜 잊고 있었던 거지!!”

그제야 나는 코토리와의 내기를 떠올렸고, 내가 내기에서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윽. 내가 그 중요한 내기를 잊고 있었다니.... 이건 다 사쿠라 씨 때문이야!!”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리면 그걸 방해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했던가. 나름 여러 가지 대응 방안을 생각해뒀었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아아아아아.....그냥 물어물어 갈걸...”

뒤늦게 후회를 해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엎질러진 물. 또 말하는 것 같지만 난 그 물을 원래대로 할 수 없다. 그냥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이상하게 일들이 꼬이네.”

어제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사쿠라 유메라는 민폐녀와의 에피소드, 오늘 아침에 있었던 화장실 에피소드, 그리고 코토리와의 내기. 전부 나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이긴 하지만, 모두 나에게 안 좋은 쪽으로 끝났기 때문에 조금 미심쩍다.

“...혹시 흑막이 있다던가...?!”

같은 이상한 생각을 할 정도로, 나의 요 근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정확하게 집어내자면 사쿠라 씨가 나를 찾아왔던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야. 그냥 우연이겠지.”

고개를 흔들면서 애써 부정을 하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 나는 눈을 감고 잠수를 했다. 머리를 물속에 넣으면서 생긴 물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끼면서 머릿속에 있던 불안감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너무 오랫동안 들어가 있어서 욕조에서 나온 후 잠시 기절했었다는 건 나밖에 모르는 나의 에피소드다.

그렇게 나의 등교 첫 날은 허무하게 날아갔고, 원래 두 번째 날이어야 정상인 내 등교 첫 날.

“저기, 위치만 알면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난 나의 양 옆,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인건가, 아니면 안 들렸던 건가.

‘무시.......겠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안 들렸을 리 없다. 이건 100% 무시다. 나는 다시 한 번 말을 하기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이젠 나 혼자서도.....”

“안 돼. 혼자 보냈다간 또 옆길로 샐 거야.”

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나의 말을 잘라먹었다. 지금 나의 상황은 찍소리도 못 하고 끌려갈 판이다.

‘샐 지도 몰라가 아니라 샐 거야라니.... 나의 신용도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군...’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인정은 하지만, 나도 사람인 이상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논할 권리는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가지고 한 번 더 말하기로 했다.

“난 어린이가 아니니까....”

“네. 어린이는 아니죠. 그냥 변.태.일 뿐이죠.”

“......................”

이번엔 내 왼쪽에 있는 사람이 나의 말을 잘라먹었다. 순간 내 가슴 속에선 분노가 솟아올랐지만, 그것을 표출하지는 못하기에 내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다.

‘아...아직 포기하면 아니 된다. 나는 당당하다. 내가 밀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마음속으로 힘껏 자신을 응원한 후,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사쿠라 ㅆ.....”

“딴 맘이 없다면 그냥 우리들이랑 같이 가도 상관없잖아! 그냥 걸어!”

“.......................”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격퇴. 3전 3패로 나의 완패다. 이젠 덧없이 끌려간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처한 자기 자신이 조금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내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 오른쪽에는 오토메 누나가, 왼쪽에는 아사쿠라 유메라는 민폐녀가, 그리고 내 뒤에는 사쿠라 씨가 바짝 붙어서 내가 옆길로 새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이게 다 어제 있었던 나의 무단결석 때문인데....

“어째서 오토메 누나까지 날 감시하는 거야?!”

난 오토메 누나를 보면서 따졌다. 사쿠라 씨가 날 감시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녀까지 날 감시하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학생회장이고 이웃사촌이니까 당연하잖아!”

깨갱.

어련하시겠습니까. 물어본 제가 잘못했지요. 네, 죄송합니다.

이번엔 대상을 바꿔서 민폐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은 말을 걸고 싶진 않았지만, 내 왼쪽에 바짝 붙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넌 뭐야.”

“좋아서 있는 거 아니니까 닥쳐주세요.”

“싫으면 비켜.”

“나도 싫어! 근데 언니가 시키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있는 거야!”

이런 반응은 좀 오랜만이랄까 신선했기 때문에 왠지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조금 생각해보면, 사이가 나쁘면 은근히 놀려먹기 아주 편하다. 라고 생각한 나는, 그녀를 조금 놀리기로 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날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언니가 시키는 거라곤 하지만.....”

(퍼억!!)

“크억!!!”

순간 왼쪽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나는 몸을 기역자로 꺾으며 옆구리를 마구 비벼서 아픔을 빨리 날려버리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흥. 헛소리 하는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죠.”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 나가는 그녀를 보자니 화가 나서 마음껏 욕을 하고 싶었지만, 방금 전 타격 때문에 못 움직이고 있는 나를 사쿠라 씨와 오토메 누나가 노려보고 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발을 움직여야 했다.

‘신이시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아니, 잘못은 했지만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런 고통을 주는 거냐!!!!!!!!!!!!!!!!’

결국 난 쌓여있던 모든 분노를 마음속에서 신을 향해 표출하는 것으로 이번 일로 생긴 감정을 날려버려야만 했다.

(웅성 웅성)

시선이 따갑다. 솔직한 심정으로 부담된다. 민폐다.

(웅성 웅성)

하지만 그녀들은 절대로 내 곁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부러울지도 모르지만, 난 결코 기쁘지 않다.

“이제 학교가 코앞인데 슬슬 떨어져 주실래요?”

“이제 학교가 코앞인데 왜 그래야 하는데?”

“..............”

오토메 누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들은 나와 함께 등교했다.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에 꽂혀있는 것 같아서 마치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매일 매일 이렇다면 다른 학생들의 시선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다... 어떻게든 해야겠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내일부터는 반드시 혼자서 등교하리라 다짐하는 나였지만, 가슴 한 구석에선 그녀들이 매일 이럴 것이라는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쿠라 씨에게 대충 소속 반에 대해서 들은 후, 민폐녀의 안내를 받아 교실에 도착했다. 사실 오토메 누나의 안내를 받고 싶었지만, 그녀는본교 학생이라 다른 건물에 교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같은 건물인 민폐녀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날 안내하는 것이 싫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내가 귀찮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억지로 그녀의 안내를 받아냈다.

“흠... 여기가 내가 있을 교실이란 말이지.”

교실 문 위에 3-B라고 적혀있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내가 신세를 지게 될 이곳에서, 황당한 일만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문을열었다.

(덜커덩!!)

“...............”

문이 안 열린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뻑뻑하다. 탁하고 막힌 느낌이다. 드르륵하고 열려야 할 문이 열리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다시 문을 열려고 팔을 움직여봤다.

(덜커덩!!)

똑같은 반응. 앞문이 잠겨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면 뒷문으로도 학생들이 들어가고 있으니까. 그 말은 당연히 앞문도 열려 있다는것이다.

등교 첫 날부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이 한 몸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

순간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민폐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내가 못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웃고 있을 게 틀림없다. 뒤를 돌아보진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고작 이런 것에 창피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서 되겠는가! 단숨에 열어주겠다!’

라는 생각으로 있는 양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힘껏 문을 옆으로 당겼다.

(덜커덩! 덜커덩!)

“....어째서 안 열리는 거야!!!!!”

포기. 그리고 절규.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폐녀가 곁으로 다가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열리는 문은 저건데요.”

“.....................”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문은 바로 2개의 문 중 ‘열리지 않는 문’. 잘만 열리는 문을 내버려두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했으니, 어지간히 힘이 좋은 사람이 아닌 이상 열릴 리가 없다.

‘어째서 반대쪽 문을 열어볼 생각을 안 한 거지...’

털썩하고 쓰러져 좌절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느껴보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지만 그것보다 민폐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충격이었다.

“풉.”

순간 귀를 강타하는 그녀의 비웃음. 남들은 다 구구단을 하는데 나만 못 해서 욕먹는 것보다 더 슬프다. 평생 씻을 수 없는 굴욕이다.

‘저 녀석이......’

그녀가 잘못 한 것이 없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고, 내봤자 그저 분풀이일 뿐이니까 그것을 꼬투리로 또 놀림을 받을 거고.......이래저래 나만 안 좋은 상황이다.

“그럼 전 이만......”

실컷 즐겼는지 그녀는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난 놓치지 않았다.

‘내 반드시 저 녀석에게 복수하리라. 꼭! 반드시! 절대로!’

어린 아이의 생각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그녀가 굴욕을 느낄만한 사건이 다가오길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아 그래. 내가 이럴 시간이 없지.”

곧 종이 칠 것을 깨달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복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챙겼다. 심호흡을 가볍게 한 뒤, 이번에는 열리는 문을 가볍게 열었다.

---------------------------------------------------------

....복붙은 은근히 짜증나는 것 같아요 -_-;;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2화>

집으로 돌아온 후, 나와 사쿠라 씨는 잠시 거실에서 TV를 보면서 쉬기로 했다. 테이블에는 차가 담긴 컵이 놓여 있었고, 한 입에 들어갈 정도의 쿠키가 그릇에 담겨 있다. TV에서는 지루한 프로그램들밖에 하지 않아서 나의 심심함은 한계에 도달했다. 마침 사쿠라 씨에게 할 이야기도 있던 나는 사쿠라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쥰이치 씨는 뭔가 좀 특이한 분이네요.”

“응? 오빠가? 음..........그런가?”

TV를 보고 있던 사쿠라 씨는 내 말에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더니 잠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쥰이치 씨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는지, 곧 특유의 밝은 웃음을 보이면서 말하셨다.

“뭐, 오빠가 좀 웃기긴 하지.”

“아니, 그 쪽이 아니라 조금 신비롭다고나 할까요.”

내가 한 말이 생각지도 못했던 거였는지, 사쿠라 씨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관심을 보였다.

“신비로워? 어떤 면에서?”

“뭐랄까.........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자마자 ‘잠시 나랑 상담 좀 할까.’라고 말하는 점?”

“하긴. 초면에 그런 걸 하는 사람은 드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쿠라 씨는 TV에서 시선을 때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쥰이치 씨와의 상담에 대해 물어보셨다.

“어땠어? 오빠와의 상담은?”

“글쎄요. 그게 상담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사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런 저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쓸데없이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결론적으로 내가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조언을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

순간 사쿠라 씨가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구지 물어보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으로 우리들의 대화는 끝났고, 시선은 다시 TV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TV에서는 여전히 재미없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 그래.”

“......응??”

한동안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이 떠올라서 나는 재빨리 사쿠라 씨에게 말했다. 바로 내일 이야기다.

“전 내일 카자미 학원에 입학하게 되는 거죠?”

“응? 아.........그랬나?”

마치 자신도 몰랐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런 나의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안심하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 수속은 다 끝냈고 준비도 다 해뒀으니까. 남은 건.........”

“남은 건?! 뭔가 남아 있는 건가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사라지려고 했던 불안함이 다시 솟아올랐다. 하지만 뒤이어서 그녀가 한 말은,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함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너의 개그 스펙?”

“..............................”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나의 착각일 것이다. 나의 불안감이 사쿠라 씨가 한 말을 이리저리 왜곡시켜서 이상하게 조합되어서 나의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이 틀림없다. 난 나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쿠라 씨에게 물어봤다.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개그 스펙이라니.......”

“응? 잘못 들은 게 아니야.”

“...........................”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내 귀를 의심했고, 사쿠라 씨를 의심하게 만든 신을 저주했다. ‘될 대로 되라.’는 게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정한 나의 좌우명이었는데, 정말로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가볍게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나를 보던 그녀는 쐐기를 박으려는 듯이 대답했다.

“왜 그거 있잖아.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일단 자신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하잖아?”

“.....그래서 저보고 지금, 내일 반 아이들에게 개그를 선보여라....?”

“응. 짧고 굵게 한 방!!”

“.....................”

“....................”

활짝 웃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한 손을 위로 쫙 뻗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냥 내 맘대로 하는 편이 좋겠군.’

사쿠라 씨는 마치 자신이 생각했던 반응이 안 나와서 실망했다는 듯 한동안 뾰로통해 있었다. 그런 사쿠라 씨의 모습에서 후환이 두려웠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기 때문에 무시하기로 했다.

“사쿠라 씨. 제가 배정되는 반은 몇 반이죠?”

“응?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게 말이죠, 사실은...............”

나는 낮에 있었던 코토리와의 내기에 대해서 사쿠라 씨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쿠라 씨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셨다.

“그래서, 그 내기에서 이기고 싶다고?”

“네. 그러니까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만.”

“....................”

‘뭐?! 즉답이 아니야?!’

사쿠라 씨는 잠자코 눈을 감으시더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할 거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그녀가 나를 도와준다면 100%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나로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 도와주실 건가요?”

“...............”

“그냥 내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뿐이니 좀 도와주세요. 네?”

내가 간절히 부탁해도 사쿠라 씨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셨다.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슬슬 걱정과 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 사쿠라 씨는 입을 열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도와줘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네?”

YES or NO로 대답할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의 말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응? 깨닫지 못 한 거야? 이 내기는 네가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어째서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내가 이길 확률이 0%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피해 다닐 계획도 잘 짜뒀고, 사쿠라 씨만 도와준다면 내기에서 이길 확률은 100%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데요. 사쿠라 씨의 그 말.”

“....어디까지 바보인거야 넌.”

“실례입니다. 이래 뵈도 나름 철저한 계획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아..................”

‘하아.............’

깊은 한숨을 쉬는 사쿠라 씨. 답답한 나 또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직접 경험해봐. 그럼 알 게 될 테니까.”

“그럼 안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난 별로 관심 없으니까, 알아서 잘 해봐.”

사쿠라 씨는 그렇게 고개를 다시 TV쪽으로 돌리셨고, 할 수 없이 나는 그녀의 도움 없이 내기에서 이겨야 했다.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크진 않았지만, 조금 더 귀찮아졌다는 건 사실이었다.

‘할 수 없군. 내 힘만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걸 두 사람에게 보여줘야겠어.’

“그럼 전 이만 올라갈게요.”

“응? 이제 자려고?”

“네. 아직 방 구경도 안 했으니 자기 전에 좀 살펴보려고요.”

“그래? 알았어. 잘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사쿠라 씨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나왔다. 그 후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 다음, 4개의 방 중에서 내가 쓰게 될 방으로 들어갔다.

“호오... 이런 식이란 말이지....”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건 문 바로 옆에 있는 검정색 계열의 색상으로 되어있는 책상이었다. 책상 위에는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가방과 책들이 놓여있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니 적당한 크기의 옷장과 책장이 보였다. 아직은 많이 비어있지만, 그쪽이 내가 원하는 물건을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좋았다.

“오. 이게 내가 쓸 침대란 거지?”

책장과 옷장 정면에는 침대가 놓여있었다. 창가에 놓는 구조라서 햇빛이 들어오는 걸 막는 것도 없고, 적당한 높이라서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창문이 너무 큰 거 아닌가?”

침대에서 시선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조금 크다고 생각되는 창문을 볼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니 아사쿠라家가 바로 보였다. 거실 쪽에 불이 켜있는 것으로 보아, 저쪽은 아직 안자고 있는 듯 했다.

“책상이 있는데 구지 테이블이 필요하나?”

방 중앙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정사각형이라 최대 4명이 사용할 수 있었고, 모서리 부분이 둥글게 되어 있어서 모서리에 부딪혀도 크게 다칠 염려는 적어보였다. 아무래도 손님이 방에 들어왔을 때 이용하려고 있는 것 같은데, 난 테이블 같은 건 잘 안 쓰는 성격이라 조금 불편할 것 같았다.

“내가 살던 곳과의 환경과 너무 다른 게 문제이긴 하지만, 적응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난 예전 세계에서 방바닥에서 잤고, 테이블은 접이식으로 방 한 편에 놔둔 다음, 필요할 때만 꺼내서 썼었다. 방을 최대한 넓게 쓰자는 게 당시 나의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에, 좁아 보이는 이 방 구조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사쿠라 씨한테 건의를 좀 해야겠어.”

침대까진 이해할 수 있지만, 공간을 차지하는 이 테이블만큼은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후아암... 일단 잠이나 자자....”

잠이 와서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바로 침대가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이런 저런 일들을 겪어서 피곤했는지, 예전 세계에서 잠시 뒤척이다가 자던 버릇은 나오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다.

-----------------------------------------------------------------

티스토리 블로그에 안 올려뒀던 부분을 백업중입니다.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

-11화-

“..............”

“..............”

침묵. 상황에 따라선 참 좋은 단어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녀석이다. 가능하면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내 생각대로 된다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은 법.

“저기.....유메 씨? 간장을 좀 줬으면 하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다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지는 않지만, 나에겐 지금 간장이 필요했고, 그 간장이 담겨져 있는 통이 그녀의 앞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녀는 무반응. 이쪽을 보는 일도 없고, 그저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자, 여기 있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오토메 누나가 간장 통을 집어서 나에게 주었다. 내 개인 접시에 간장을 따른 후 조심스럽게 간장 통을 식탁 위에 놓았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간장 통을 자신의 옆으로 가져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은근히 가시방석인데 이거.’

옆에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쿠라 씨가 한 마디 하셨다.

“무슨 일 있었어?”

“뭐.....별거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찌릿.

순가 날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아주 차가웠다. 그 눈빛에 압도당한 나는 바로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제 잘못이 좀 더 컸습니다.”

“어라? 그건 마치 저도 잘못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톡 쏘는 말투로 말하는 그녀는 여전히 이쪽을 보지는 않았다. 내 쪽에서도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난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언제까지 삐져있을 거야? 내가 아까 사과했잖아.”

“하아?! 사과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면 경찰이고 법이고 다 필요 없죠! 안 그래요?!”

내 말에 발끈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질세라 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그렇게 큰 문제야?! 고작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갔던 것 가지고. 너무 쪼잔 한 거 아냐?!”

“쪼잔?! 고작!? 방에 들어와서 저한테 한 행동은 기억이 안 나시나보죠?!”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밥공기와 젓가락이 들려져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우리들의 말싸움은 계속 되었다.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너무 한 거 아니야?!”

“장난도 정도가 있어요!!”

코를 막아서 숨을 쉽게 쉬지 못 하게 한 내 장난이 잘 한 짓은 아니지만, 장난이지 않은가? 이렇게 화를 낼 정도로 내가 잘못한 걸까.

“........세이토.”

“.............네.”

오토메 누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화가나 있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알 수 있는 톤이었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알게 된지 하루도 안 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전혀 오토메 누나 같지 않았다.

“지금은 분명히, 식사 중, 이지요?”

“........잘못했습니다.”

그녀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오토메 누나는 이번엔 자신의 옆에서 서 있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말했다.

“유메도, 앉아야지?”

“.............응.”

그녀도 지금 자신의 언니가 어떤 모습인지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즐겁게 식사를 계속 합시다~”

이 저녁식사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던 건, 동생이 아니라 언니 쪽이었을 지도....







“오토메 누나가 화를 내는 경우가 빈번합니까?”

“글쎄.... 어떤 행동을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보기 힘들다고 해야겠지.”

‘허허.’라며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이 남자는 바로 오토메 누나의 할아버지인 아사쿠라 쥰이치 씨. 겉모습은 백발의 늙은 노인이지만, 사쿠라 씨와 비슷한 나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사쿠라 씨가 상당한 동안이라는 건 사실인가보다. 사쿠라 씨는 쥰이치 씨를 부를 때 ‘오빠’라는 호칭을 쓰던데, 저 나이가 되어서도 그런 말을 듣는 게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래. 우리 아이들의 첫 인상은 어땠지?”

우리 아이들이란 건 오토메 누나와 민폐녀를 말하는 거였다. 민폐녀란 내가 오토메 누나의 동생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반대로 난 변태란 별명을 얻게 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글쎄요. 보기드믄 미인들이었다?”

“하하하. 내 손녀들이니 그거야 당연하지.”

호쾌하게 웃는 쥰이치 씨의 모습에선 오토메 누나에게서 느껴졌던 온화함이 있었다. 세상 걱정거리 없는 나이 많은 어르신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밖에 뭔가 다른 건?”

“음.........그것 이외엔 특별히 느낀 건 없었는데요.”

“그렇단 말이지.....”

쥰이치 씨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계셨다. 궁금한 것이 있었던 나는 쥰이치 씨에게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저기, 쥰이치 씨.”

“음? 왜?”

“왜 제가 지금 쥰이치 씨와 면담을 나누어야 하는 거죠. 전 돌아가서 자고 싶은데요.”

“까칠하긴. 앞으로 사쿠라의 집에서 살게 되는 남자 아이인데 어떤 녀석인지는 알아둬야 할 거 아니야. 명색에 사촌인데.”

“그렇군요......”

뭔가 납득이 가면서도 안 가는 듯한 미묘함이 남았지만, 수긍이 가는 이유였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했다. 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들고 입에 댄 순간, 쥰이치 씨는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어때. 둘 중 한 명을 애인으로 삼아보지 않겠어?”

“푸훕!!!!!!!”

순간 놀란 나는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어버렸다. 다행이 크게 튀진 않아 재빨리 수습이 가능했다.

“그 정도로 놀랄 이야기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쥰이치 씨를 보며 나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나는 말했고, 쥰이치 씨는 반대로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말했다.

“글쎄..... 이상한 부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애인이란 단어가 들어간 순간부터 이상한 거였습니다.”

“응? 우리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런 말을 하셔봤자....”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쥰이치 씨는 그런 나의 모습을 지긋이 보고 계셨다.

“.....................”

“....왜 그러시나요?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응? 아니.....................푸하하하하하!!!!”

갑자기 쥰이치 씨는 웃기 시작하셨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의아해할 뿐이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하하하하하......아이고 배야.......”

쥰이치 씨는 웃음을 멈출 줄 몰랐고, 나는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다짜고짜 웃기 시작하는 사람을 보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미안, 미안. 하지만 네가 놀리기 참 쉬워보였거든. 아이고 배야.....”

‘...이 사람이 지금....’

만화였다면 내 이마에 화가 났을 때 나타나는 것이 탁하고 등장했을 것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화의 이야기. 어쨌든 쥰이치 씨는 한참을 웃으시다가, 곧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나를 보며 말하셨다.

“자, 그럼 주제를 바꾸어서”

‘이 사람, 행동과 표정의 변화가 너무 심해!!’

“혹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게임의 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

갑자기 쥰이치 씨는 엉뚱한 쪽의 질문을 하셨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진지한 쥰이치 씨의 표정에 나는 나름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게임을 하다보면 이것을 할지 저것을 할지 선택하는 선택지가 나오기도 하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게임의 진행이 좌지우지되고 말이지.”

“뭐...확실히 그렇죠.”

쥰이치 씨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리가 없는 나는 그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쥰이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생각하지. ‘아, 다른 걸 선택할걸.’라고 말이지. 그것이 바로 후회란 녀석이지.”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한다.’라는 걸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듣고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생각해본 것을 나는 말해보았다. 쥰이치 씨는 내 생각이 맞았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하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야.”

“.......................”

“그래서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결론을 이야기 해주시죠. 전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빨리 쥰이치 씨의 목적을 알고 싶었던 나는, 결국 그의 말을 잘랐다. 쥰이치 씨는 조금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말하셨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 자신이 선택한 것을 믿어라.”

“.............??”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쥰이치 씨는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나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말하셨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니까 지금 당장은 신경 안 써도 괜찮아. 하하하!!!!”

‘....그럼 신경 안 쓰이게 만들던가요.’

속으로 불만을 토하면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에 엄숙함이 합쳐져 있는 그에게서 저런 말을 들으니, 앞으로의 내 인생이 힘들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아사쿠라家를 나와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나는 하늘을 보았다. 평소엔 땅을 보면서 걷는 편이라 좀처럼 하늘을 볼 수 없어서 참으로 오랜만이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믿어라................................인가.”

별 거 아니지만 내 가슴속에 깊숙이 꽂힌 쥰이치 씨의 그 말을 나는 몇 번이도 되뇌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그 순간까지.....

----------------------------------------

오랜만에 포스팅.

오랜만에 소설을 썼기 때문에 휘리릭하고 올립니다.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