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점심시간은 찾아왔다. 오늘은 평범하게 혼자서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도시락은 내키지 않으니 이번엔 패스.
‘아....오늘은 행복한 식사 시간이 될 것 같아....’
며칠 만에 찾아온 평화일까. 그 어떤 일에도 얽히지 않고 혼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내일은 다른 사람과 먹어도 아무런 불평을 안 할 테니까, 제발 이 평화를 만끽하게 해주세요!’
라고 신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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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말이지?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머리카락이 약간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 분다. 이 따뜻한 날씨와 아주 잘 맞는다. 그런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난 따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학생식당이 아니다. 건물 내부에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카자미 학원 내부에 있는 어떤 잔디 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잔디에 놓인 돗자리 위. 그리고 내 주변엔 남학생 2명과 여학생 3명이 있다. 나를 포함해 6인 그룹이라는 말.
“.......뭔데?”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작은 악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 화가 났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이득이 없다는 것쯤은 이제 알 것 같다.
“물론 식사는 여러 명이서 하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여전히 ‘난 아무것도 몰라요.’란 표정이다. 화가 나지만 忍, 忍, 忍이다. 세 번 참으면 복이 온다고도 하지 않은가? 힘들지만 꾹 참는 것이 답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정도는 혼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어.”
“그래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특별히 대답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그 반응에 난 의욕이고 거부고 뭐고 모두 사라졌다. 더 이야기 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다. 기브업.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재미없는 남자.”
이 작은 악마는 내가 포기하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끝나자마자 히죽 웃으면서 승리의 V를 보였다.
‘뭔가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과연 내가 이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패배감과 허무함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내 시야에 들어오는 5명의 학생들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채로 있어야 했다.
학생식당에서 평화를 만끽하려고 했던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했냐는 점심시간이 시작할 때의 교실로 돌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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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어디보자.......”
기지개를 피면서 느긋하게 무라사키와 코토리의 행동을 살폈다. 식사를 하려는 것뿐인데 왠지 그녀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좀 씁쓸했지만, 그래야만 내가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흠......그렇단 말이지.....’
다행히 그녀들이 나를 방해할 것 같은 낌새는 없었고, 마음이 놓인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디 학생식당으로 가볼까?’
그렇게 느긋하게 학생식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사쿠라이.”
내 옆에 앉아 있던 작은 악마, 유키무라 안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가만히 유키무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눈살이 살짝 찌푸렸다.
“....대답은?”
‘이 녀석을 체크하지 않은 건 실수군...’
이런 일에까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슬퍼지는 나였다.
“묵비권?”
“아니 그런 건 아닌데.................왜 부른 거야?”
처음부터 바로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녀의 부름에 움직임을 멈춘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났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의 대화를 시작한다.’라는 선택지를 선택했다. 게임이었다면 세이브한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겠지만 그건 게임이고, 이건 현실이다.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
“거절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녀가 날 불러 세운 이유를 안 순간,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 내 대답을 들은 유키무라는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같이 먹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즉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모처럼 제대로 만든 음식을 먹게 해주려고 했는데.”
“보나마나 또 겨자를 넣은 음식이 있겠지. 아니면 극한의 짠맛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라던가.”
“....내 신용도가 그렇게 낮아?”
“‘내 안에서’는 말이지.”
“흐음.....”
불만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키무라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뭔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장소를 벗어날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그럼 난 이.......”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
고개를 돌리며 한 발 때려는 순간, 유키무라는 그 자세 그대로 나직이 무언가를 말했고, 그녀가 한 말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말이 만약 잘못 들린 거라면, 난 또다시 절호의 찬스를 노친 것이다.
“.........뭐라고?”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유키무라를 봤다. 그녀는 웃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젠장. 난 정말 이 녀석한테 이길 수 없는 거냐.’
“하아............”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내 포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른 편이다. 내 마음과 뇌엔 이미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란 지울 수 없는 말이 박혀버렸다. 할 수 없이 오늘 있을 ‘즐거운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끌리긴 끌리나 보네?”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가 왠지 모르게 미웠다. 특히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저 모습이, 저 웃음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녀석과 얽히게 된 걸까.
‘....하긴. 다 자업자득이겠군.’
처음 그녀의 도시락을 받아먹은 것도 나였고, 도서관에서 말을 먼저 건 것도 나다. 모든 걸 포기한 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누구라도 ‘초호화’란 단어가 들으면 순간적으로 반응을 하게 될 거야.”
“그렇겠지. 그걸 노리고 말한 거니까.”
“.....알고 있으면 묻질 말던가.”
“그 편이 더 재미있잖아?”
나와 대화를 하는 게 언제나 승부인지, 이번에도 그녀는 가볍게 승리의 V사인을 보이며 말했다. 그것에 대한 태클을 걸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그래서? 교실에서 먹는 건가?”
“아니.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 거야.”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1인분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조금 큰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런 말, 한 기억도 없어.”
내 질문에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교실을 나갔고, 모든 걸 포기한 난 천천히 그녀를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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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이유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끌려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배고프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질렸다’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다만 유키무라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서로 말하는 게 정상 아닐까?”
“아니, 나도 그건 알고 있지만........배고픈 건 사실이라고. 실제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유키무라의 말에 바로 대답을 했다. 내 대답에 그녀는 특유의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붙잡은 적 없는데?”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이 녀석과 싸우면 항상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데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심히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라 이쪽에서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자기소개정도는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난 사쿠라이 세이토. 3-B.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지금 있으니까 오늘 하루 잘 부탁해.”
난 앉은 채로 고개를 살짝 꾸벅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내 앞에 있는 2명의 여학생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지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녀들이라고 뭘 알 수 있겠는가.
“난 이타바시 와타루라고 해! 잘 부탁한다!”
갑자기 내 왼쪽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내 등을 강하게 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 맞은 나는 화가 나서 그 녀석을 노려봤다.
“지금 시비 거는 거냐?”
“하하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뜻이니까 그렇게 너무 정색하지 마!”
이타바시란 남학생은 다시 한 번 내 등을 치면서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모르겠지만, 크고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이타바시는 웃고 있다. 같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난 그의 당돌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풋. 너 이상한 녀석이구나.”
그 친근감은 결국 웃음이라는 것으로 발전했고, 기분이 완전히 풀린 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타바시는 천성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유키무라가 옆에서 보충 설명을 해줬다. 적당히 이해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뭔가 강요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빨리 밥을 먹고 싶은 이쪽 심정도 이해해줬으면 했다.
한 명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연분홍색의 머리색이었다. 머리를 일부 앞쪽으로 두고 있는데, 끝부분이 롤 헤어 형식처럼 약간 말려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생각보다 가슴이 크군.....’
그렇다. 그녀는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유키무라와는 달리 존재감이 너무 있는 가슴을 소유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거유란 게 바로 저런 걸까.
“........그렇게 사쿠라이는 아카네의 가슴에 매료되었다.”
옆에서 지긋이 날 보고 있던 유키무라가 내레이션 같은 말투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내레이션 말투냐.”
“......부정하지 않는다?”
“보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매료되진 않았어.”
내 말에 두 여학생의 몸이 살짝 움직였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봤는데도 매료되지 않았다고? 저렇게 큰 가슴에?”
유키무라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하면 내가 나쁜 사람으로 취급될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보는 것도 안 되냐.”
“요즘은 보는 것만으로도 성희롱이 적용되는 세상이라서 말이지.”
“도대체 어떻게 된 세상인거냐 여긴.”
우리들의 대화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고, 대화가 끝나자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대상자 쪽으로 향했다.
“....에.....그러니까.....아하하.”
당사자는 조금 당황한 듯 웃기 시작했다. 자기소개 차례가 그녀에게 넘어간 것 같지만,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점심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만 같아서 난 그녀를 독촉하기로 했다.
“가슴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이름이라도 좀 알고 싶은데.”
“......라면서 작업을 걸기 시작하는 그였다.”
“그러니까 그 말투 좀 그만하라고.”
유키무라는 또다시 내레이션 말투로 말했고, 난 거기에 자연스럽게 태클을 걸어버렸다. 이러다가 그녀와 함께 만담꾼이 되는 게 아닐까.
“아, 미안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그녀였다.
“내 이름은 하나사키 아카네야. 잘 부탁해.”
“자, 다음.”
난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그 다음으로 하나사키의 옆에 앉아 있는 여학생을 봤다.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연갈색의 머리색이었다.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위쪽으로 뻗어 나와 흡사 안테나 같은 모습을 띄며, 또 다른 일부분은 별도로 묶어서 측면으로 튀어나도록 해두었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이라 그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찾기 편리할 것 같았다.
그녀도 하나사키 못지않게 가슴이 좀 컸지만, 계속 봤다간 유키무라가 또 그것으로 한마디 할 것 같아서 시선은 얼굴에 고정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인 걸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아!! 내....내 이름은 츠.....츠키시마 코콧!! #%$$%#!!!!”
‘씹었군.’
긴장을 했는지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 혀를 씹은 것 같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유키무라가 한마디 했다.
“사쿠라이는 코코같은 사람을 주로 노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이봐.”
유키무라는 정말 가만히 놔뒀다간 뭘 할지 모르는 녀석이다. 그런 그녀와 함께 친구로 있는 그들이 내심 존경스러웠다.
“얘 이름은 츠키시마 코코야. 미안해. 긴장을 좀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아니 그냥 이름을 물어본 건데 그렇게 긴장할 것까진 없잖아.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난 마지막으로 이타바시의 옆에 앉아서 가만히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학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비공식 신문부에 들 생각이 있는가?”
“뭐야 그건.”
사쿠라 씨나 오토메 누나, 코토리를 통해 카자미 학원 내의 동아리에 대해서 대충 들었는데, 그런 이름의 동아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 듣는 이름이 살짝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후후후........들어오고 싶은가?”
눈을 지그시 감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사기꾼’이라던가 ‘위험한 사람’이란 오오라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와 얽히게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보다 더 심한 문제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사양하마.”
“흠. 그런가. 아쉽군. 동지여.”
“그러니까 동지로 만들지 말라고.”
아무래도 이 녀석은 마이페이스인 것 같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유키무라처럼 내가 태클을 걸어야 한다는 점도 상당히 피곤할 것 같다.
‘하아...두 번 같이 식사했다간 내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난 유키무라와 얽히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다짐했다. 다음엔 반드시 딱 잘라서 거절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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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토의 후기>
드디어 20화!
-세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