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

침묵. 상황에 따라선 참 좋은 단어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녀석이다. 가능하면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내 생각대로 된다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은 법.

“저기.....유메 씨? 간장을 좀 줬으면 하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다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지는 않지만, 나에겐 지금 간장이 필요했고, 그 간장이 담겨져 있는 통이 그녀의 앞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녀는 무반응. 이쪽을 보는 일도 없고, 그저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자, 여기 있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오토메 누나가 간장 통을 집어서 나에게 주었다. 내 개인 접시에 간장을 따른 후 조심스럽게 간장 통을 식탁 위에 놓았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간장 통을 자신의 옆으로 가져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은근히 가시방석인데 이거.’

옆에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쿠라 씨가 한 마디 하셨다.

“무슨 일 있었어?”

“뭐.....별거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찌릿.

순가 날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아주 차가웠다. 그 눈빛에 압도당한 나는 바로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제 잘못이 좀 더 컸습니다.”

“어라? 그건 마치 저도 잘못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톡 쏘는 말투로 말하는 그녀는 여전히 이쪽을 보지는 않았다. 내 쪽에서도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난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언제까지 삐져있을 거야? 내가 아까 사과했잖아.”

“하아?! 사과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면 경찰이고 법이고 다 필요 없죠! 안 그래요?!”

내 말에 발끈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질세라 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그렇게 큰 문제야?! 고작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갔던 것 가지고. 너무 쪼잔 한 거 아냐?!”

“쪼잔?! 고작!? 방에 들어와서 저한테 한 행동은 기억이 안 나시나보죠?!”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밥공기와 젓가락이 들려져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우리들의 말싸움은 계속 되었다.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너무 한 거 아니야?!”

“장난도 정도가 있어요!!”

코를 막아서 숨을 쉽게 쉬지 못 하게 한 내 장난이 잘 한 짓은 아니지만, 장난이지 않은가? 이렇게 화를 낼 정도로 내가 잘못한 걸까.

“........세이토.”

“.............네.”

오토메 누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화가나 있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알 수 있는 톤이었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알게 된지 하루도 안 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전혀 오토메 누나 같지 않았다.

“지금은 분명히, 식사 중, 이지요?”

“........잘못했습니다.”

그녀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오토메 누나는 이번엔 자신의 옆에서 서 있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말했다.

“유메도, 앉아야지?”

“.............응.”

그녀도 지금 자신의 언니가 어떤 모습인지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즐겁게 식사를 계속 합시다~”

이 저녁식사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던 건, 동생이 아니라 언니 쪽이었을 지도....







“오토메 누나가 화를 내는 경우가 빈번합니까?”

“글쎄.... 어떤 행동을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보기 힘들다고 해야겠지.”

‘허허.’라며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이 남자는 바로 오토메 누나의 할아버지인 아사쿠라 쥰이치 씨. 겉모습은 백발의 늙은 노인이지만, 사쿠라 씨와 비슷한 나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사쿠라 씨가 상당한 동안이라는 건 사실인가보다. 사쿠라 씨는 쥰이치 씨를 부를 때 ‘오빠’라는 호칭을 쓰던데, 저 나이가 되어서도 그런 말을 듣는 게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래. 우리 아이들의 첫 인상은 어땠지?”

우리 아이들이란 건 오토메 누나와 민폐녀를 말하는 거였다. 민폐녀란 내가 오토메 누나의 동생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반대로 난 변태란 별명을 얻게 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글쎄요. 보기드믄 미인들이었다?”

“하하하. 내 손녀들이니 그거야 당연하지.”

호쾌하게 웃는 쥰이치 씨의 모습에선 오토메 누나에게서 느껴졌던 온화함이 있었다. 세상 걱정거리 없는 나이 많은 어르신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밖에 뭔가 다른 건?”

“음.........그것 이외엔 특별히 느낀 건 없었는데요.”

“그렇단 말이지.....”

쥰이치 씨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계셨다. 궁금한 것이 있었던 나는 쥰이치 씨에게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저기, 쥰이치 씨.”

“음? 왜?”

“왜 제가 지금 쥰이치 씨와 면담을 나누어야 하는 거죠. 전 돌아가서 자고 싶은데요.”

“까칠하긴. 앞으로 사쿠라의 집에서 살게 되는 남자 아이인데 어떤 녀석인지는 알아둬야 할 거 아니야. 명색에 사촌인데.”

“그렇군요......”

뭔가 납득이 가면서도 안 가는 듯한 미묘함이 남았지만, 수긍이 가는 이유였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했다. 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들고 입에 댄 순간, 쥰이치 씨는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어때. 둘 중 한 명을 애인으로 삼아보지 않겠어?”

“푸훕!!!!!!!”

순간 놀란 나는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어버렸다. 다행이 크게 튀진 않아 재빨리 수습이 가능했다.

“그 정도로 놀랄 이야기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쥰이치 씨를 보며 나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나는 말했고, 쥰이치 씨는 반대로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말했다.

“글쎄..... 이상한 부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애인이란 단어가 들어간 순간부터 이상한 거였습니다.”

“응? 우리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런 말을 하셔봤자....”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쥰이치 씨는 그런 나의 모습을 지긋이 보고 계셨다.

“.....................”

“....왜 그러시나요?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응? 아니.....................푸하하하하하!!!!”

갑자기 쥰이치 씨는 웃기 시작하셨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의아해할 뿐이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하하하하하......아이고 배야.......”

쥰이치 씨는 웃음을 멈출 줄 몰랐고, 나는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다짜고짜 웃기 시작하는 사람을 보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미안, 미안. 하지만 네가 놀리기 참 쉬워보였거든. 아이고 배야.....”

‘...이 사람이 지금....’

만화였다면 내 이마에 화가 났을 때 나타나는 것이 탁하고 등장했을 것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화의 이야기. 어쨌든 쥰이치 씨는 한참을 웃으시다가, 곧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나를 보며 말하셨다.

“자, 그럼 주제를 바꾸어서”

‘이 사람, 행동과 표정의 변화가 너무 심해!!’

“혹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게임의 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

갑자기 쥰이치 씨는 엉뚱한 쪽의 질문을 하셨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진지한 쥰이치 씨의 표정에 나는 나름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게임을 하다보면 이것을 할지 저것을 할지 선택하는 선택지가 나오기도 하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게임의 진행이 좌지우지되고 말이지.”

“뭐...확실히 그렇죠.”

쥰이치 씨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리가 없는 나는 그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쥰이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생각하지. ‘아, 다른 걸 선택할걸.’라고 말이지. 그것이 바로 후회란 녀석이지.”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한다.’라는 걸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듣고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생각해본 것을 나는 말해보았다. 쥰이치 씨는 내 생각이 맞았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하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야.”

“.......................”

“그래서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결론을 이야기 해주시죠. 전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빨리 쥰이치 씨의 목적을 알고 싶었던 나는, 결국 그의 말을 잘랐다. 쥰이치 씨는 조금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말하셨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 자신이 선택한 것을 믿어라.”

“.............??”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쥰이치 씨는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나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말하셨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니까 지금 당장은 신경 안 써도 괜찮아. 하하하!!!!”

‘....그럼 신경 안 쓰이게 만들던가요.’

속으로 불만을 토하면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에 엄숙함이 합쳐져 있는 그에게서 저런 말을 들으니, 앞으로의 내 인생이 힘들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아사쿠라家를 나와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나는 하늘을 보았다. 평소엔 땅을 보면서 걷는 편이라 좀처럼 하늘을 볼 수 없어서 참으로 오랜만이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믿어라................................인가.”

별 거 아니지만 내 가슴속에 깊숙이 꽂힌 쥰이치 씨의 그 말을 나는 몇 번이도 되뇌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그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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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포스팅.

오랜만에 소설을 썼기 때문에 휘리릭하고 올립니다.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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