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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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점심시간은 찾아왔다. 오늘은 평범하게 혼자서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도시락은 내키지 않으니 이번엔 패스.

‘아....오늘은 행복한 식사 시간이 될 것 같아....’

며칠 만에 찾아온 평화일까. 그 어떤 일에도 얽히지 않고 혼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내일은 다른 사람과 먹어도 아무런 불평을 안 할 테니까, 제발 이 평화를 만끽하게 해주세요!’

라고 신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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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말이지?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머리카락이 약간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 분다. 이 따뜻한 날씨와 아주 잘 맞는다. 그런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난 따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학생식당이 아니다. 건물 내부에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카자미 학원 내부에 있는 어떤 잔디 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잔디에 놓인 돗자리 위. 그리고 내 주변엔 남학생 2명과 여학생 3명이 있다. 나를 포함해 6인 그룹이라는 말.

“.......뭔데?”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작은 악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뭔가 화가 났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이득이 없다는 것쯤은 이제 알 것 같다.

“물론 식사는 여러 명이서 하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여전히 ‘난 아무것도 몰라요.’란 표정이다. 화가 나지만 忍, 忍, 忍이다. 세 번 참으면 복이 온다고도 하지 않은가? 힘들지만 꾹 참는 것이 답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정도는 혼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어.”

“그래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특별히 대답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그 반응에 난 의욕이고 거부고 뭐고 모두 사라졌다. 더 이야기 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다. 기브업.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재미없는 남자.”

이 작은 악마는 내가 포기하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끝나자마자 히죽 웃으면서 승리의 V를 보였다.

‘뭔가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과연 내가 이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패배감과 허무함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내 시야에 들어오는 5명의 학생들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채로 있어야 했다.

학생식당에서 평화를 만끽하려고 했던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했냐는 점심시간이 시작할 때의 교실로 돌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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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어디보자.......”

기지개를 피면서 느긋하게 무라사키와 코토리의 행동을 살폈다. 식사를 하려는 것뿐인데 왠지 그녀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좀 씁쓸했지만, 그래야만 내가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흠......그렇단 말이지.....’

다행히 그녀들이 나를 방해할 것 같은 낌새는 없었고, 마음이 놓인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디 학생식당으로 가볼까?’

그렇게 느긋하게 학생식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사쿠라이.”

내 옆에 앉아 있던 작은 악마, 유키무라 안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가만히 유키무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눈살이 살짝 찌푸렸다.

“....대답은?”

‘이 녀석을 체크하지 않은 건 실수군...’

이런 일에까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슬퍼지는 나였다.

“묵비권?”

“아니 그런 건 아닌데.................왜 부른 거야?”

처음부터 바로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녀의 부름에 움직임을 멈춘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났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의 대화를 시작한다.’라는 선택지를 선택했다. 게임이었다면 세이브한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겠지만 그건 게임이고, 이건 현실이다.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

“거절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녀가 날 불러 세운 이유를 안 순간,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 내 대답을 들은 유키무라는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같이 먹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즉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모처럼 제대로 만든 음식을 먹게 해주려고 했는데.”

“보나마나 또 겨자를 넣은 음식이 있겠지. 아니면 극한의 짠맛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라던가.”

“....내 신용도가 그렇게 낮아?”

“‘내 안에서’는 말이지.”

“흐음.....”

불만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키무라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뭔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장소를 벗어날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그럼 난 이.......”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

고개를 돌리며 한 발 때려는 순간, 유키무라는 그 자세 그대로 나직이 무언가를 말했고, 그녀가 한 말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말이 만약 잘못 들린 거라면, 난 또다시 절호의 찬스를 노친 것이다.

“.........뭐라고?”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유키무라를 봤다. 그녀는 웃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젠장. 난 정말 이 녀석한테 이길 수 없는 거냐.’

“하아............”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내 포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른 편이다. 내 마음과 뇌엔 이미 ‘초호화 도시락 3종 세트’란 지울 수 없는 말이 박혀버렸다. 할 수 없이 오늘 있을 ‘즐거운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끌리긴 끌리나 보네?”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가 왠지 모르게 미웠다. 특히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저 모습이, 저 웃음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녀석과 얽히게 된 걸까.

‘....하긴. 다 자업자득이겠군.’

처음 그녀의 도시락을 받아먹은 것도 나였고, 도서관에서 말을 먼저 건 것도 나다. 모든 걸 포기한 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누구라도 ‘초호화’란 단어가 들으면 순간적으로 반응을 하게 될 거야.”

“그렇겠지. 그걸 노리고 말한 거니까.”

“.....알고 있으면 묻질 말던가.”

“그 편이 더 재미있잖아?”

나와 대화를 하는 게 언제나 승부인지, 이번에도 그녀는 가볍게 승리의 V사인을 보이며 말했다. 그것에 대한 태클을 걸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그래서? 교실에서 먹는 건가?”

“아니.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 거야.”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1인분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조금 큰 플라스틱 통이었다.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런 말, 한 기억도 없어.”

내 질문에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교실을 나갔고, 모든 걸 포기한 난 천천히 그녀를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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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이유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끌려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배고프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질렸다’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다만 유키무라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서로 말하는 게 정상 아닐까?”

“아니, 나도 그건 알고 있지만........배고픈 건 사실이라고. 실제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유키무라의 말에 바로 대답을 했다. 내 대답에 그녀는 특유의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붙잡은 적 없는데?”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이 녀석과 싸우면 항상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데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심히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라 이쪽에서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자기소개정도는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난 사쿠라이 세이토. 3-B.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지금 있으니까 오늘 하루 잘 부탁해.”

난 앉은 채로 고개를 살짝 꾸벅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내 앞에 있는 2명의 여학생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지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녀들이라고 뭘 알 수 있겠는가.

“난 이타바시 와타루라고 해! 잘 부탁한다!”

갑자기 내 왼쪽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내 등을 강하게 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 맞은 나는 화가 나서 그 녀석을 노려봤다.

“지금 시비 거는 거냐?”

“하하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뜻이니까 그렇게 너무 정색하지 마!”

이타바시란 남학생은 다시 한 번 내 등을 치면서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모르겠지만, 크고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이타바시는 웃고 있다. 같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난 그의 당돌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풋. 너 이상한 녀석이구나.”

그 친근감은 결국 웃음이라는 것으로 발전했고, 기분이 완전히 풀린 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타바시는 천성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유키무라가 옆에서 보충 설명을 해줬다. 적당히 이해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뭔가 강요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빨리 밥을 먹고 싶은 이쪽 심정도 이해해줬으면 했다.

한 명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연분홍색의 머리색이었다. 머리를 일부 앞쪽으로 두고 있는데, 끝부분이 롤 헤어 형식처럼 약간 말려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생각보다 가슴이 크군.....’

그렇다. 그녀는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유키무라와는 달리 존재감이 너무 있는 가슴을 소유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거유란 게 바로 저런 걸까.

“........그렇게 사쿠라이는 아카네의 가슴에 매료되었다.”

옆에서 지긋이 날 보고 있던 유키무라가 내레이션 같은 말투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내레이션 말투냐.”

“......부정하지 않는다?”

“보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매료되진 않았어.”

내 말에 두 여학생의 몸이 살짝 움직였던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봤는데도 매료되지 않았다고? 저렇게 큰 가슴에?”

유키무라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하면 내가 나쁜 사람으로 취급될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보는 것도 안 되냐.”

“요즘은 보는 것만으로도 성희롱이 적용되는 세상이라서 말이지.”

“도대체 어떻게 된 세상인거냐 여긴.”

우리들의 대화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고, 대화가 끝나자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대상자 쪽으로 향했다.

“....에.....그러니까.....아하하.”

당사자는 조금 당황한 듯 웃기 시작했다. 자기소개 차례가 그녀에게 넘어간 것 같지만,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점심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만 같아서 난 그녀를 독촉하기로 했다.

“가슴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이름이라도 좀 알고 싶은데.”

“......라면서 작업을 걸기 시작하는 그였다.”

“그러니까 그 말투 좀 그만하라고.”

유키무라는 또다시 내레이션 말투로 말했고, 난 거기에 자연스럽게 태클을 걸어버렸다. 이러다가 그녀와 함께 만담꾼이 되는 게 아닐까.

“아, 미안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그녀였다.

“내 이름은 하나사키 아카네야. 잘 부탁해.”

“자, 다음.”

난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그 다음으로 하나사키의 옆에 앉아 있는 여학생을 봤다.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연갈색의 머리색이었다. 머리카락의 일부분이 위쪽으로 뻗어 나와 흡사 안테나 같은 모습을 띄며, 또 다른 일부분은 별도로 묶어서 측면으로 튀어나도록 해두었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이라 그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찾기 편리할 것 같았다.

그녀도 하나사키 못지않게 가슴이 좀 컸지만, 계속 봤다간 유키무라가 또 그것으로 한마디 할 것 같아서 시선은 얼굴에 고정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인 걸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아!! 내....내 이름은 츠.....츠키시마 코콧!! #%$$%#!!!!”

‘씹었군.’

긴장을 했는지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 혀를 씹은 것 같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유키무라가 한마디 했다.

“사쿠라이는 코코같은 사람을 주로 노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이봐.”

유키무라는 정말 가만히 놔뒀다간 뭘 할지 모르는 녀석이다. 그런 그녀와 함께 친구로 있는 그들이 내심 존경스러웠다.

“얘 이름은 츠키시마 코코야. 미안해. 긴장을 좀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아니 그냥 이름을 물어본 건데 그렇게 긴장할 것까진 없잖아.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난 마지막으로 이타바시의 옆에 앉아서 가만히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학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비공식 신문부에 들 생각이 있는가?”

“뭐야 그건.”

사쿠라 씨나 오토메 누나, 코토리를 통해 카자미 학원 내의 동아리에 대해서 대충 들었는데, 그런 이름의 동아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 듣는 이름이 살짝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후후후........들어오고 싶은가?”

눈을 지그시 감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사기꾼’이라던가 ‘위험한 사람’이란 오오라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와 얽히게 되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보다 더 심한 문제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사양하마.”

“흠. 그런가. 아쉽군. 동지여.”

“그러니까 동지로 만들지 말라고.”

아무래도 이 녀석은 마이페이스인 것 같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유키무라처럼 내가 태클을 걸어야 한다는 점도 상당히 피곤할 것 같다.

‘하아...두 번 같이 식사했다간 내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난 유키무라와 얽히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다짐했다. 다음엔 반드시 딱 잘라서 거절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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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토의 후기>

드디어 20화!

-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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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다음 날.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코토리에게 내 휴대폰의 존재를 알리고, 번호와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래?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쉽게 연락할 수 있겠네?”

코토리는 흔쾌히 나에게 번호와 주소를 알려줬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번호를 저장했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끝났을 때 1교시가 시작되었다.

 

 

“후아암.........”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창문 밖 풍경을 감상했다. 보이는 건 건물들과 벚꽃나무, 하늘정도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되겠군. 이젠 슬슬 지겨워지는데....'

어제도 수업은 안 듣고 창밖을 보기만 했다. 이곳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은 일단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뭐 사실 그것도 다 변명이겠지만.’

저런 생각들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내 머리와 몸은 따로 놀고 있으니까.

“그럼..........사쿠라이. 다음을 읽어봐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지목되었다. 물론 그 수업도 전혀 안 듣고 있었기 때문에 지목된 이유는 모른다.

“어............음..........”

“음? 혹시 자고 있었다던가?”

“자고 있던 건 아닙니다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선생님은 내가 수업을 듣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하셨다.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보면 말하셨다.

“알고 있겠죠?”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그 어떤 변명도, 반론도 하지 않고 바로 교실에서 나왔다. 이 선생님의 벌은 매우 간단했다. 잠을 자다가 걸리면 운동장 5바퀴, 딴 짓을 하다가 걸리면 운동장 3바퀴. 내 경우는 후자이기 때문에 난 운동장 3바퀴를 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동장 달리기가 벌이라니.....”

이런 말을 하면 좀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벌은 생전 처음이다. 예전 세계에선 맞는 것으로 끝내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이 체벌에 대해서 들었을 땐 조금 황당했지만, 이젠 그럭저럭 즐기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아......하아......"

물론 재미가 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재미는......하아......있는데....하아....지친다.......”

이건 여담이지만, 난 체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지쳤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앉은 채로 책상에 쓰러졌다. 체력이 좋지 않은 나에겐 운동장 3바퀴도 충분히 큰 벌이었다.

“그러게 왜 수업을 안 듣는 거야......”

내 뒤에 있던 코토리가 안쓰럽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난 엎드려있는 상태로 대답을 했다.

“지루하니까 그렇잖아. 재미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수업.”

“학생의 본업은 공부니까 싫더라도 해야지.”

“학생이라........”

왠지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갑자기 중학생이 된 자신의 현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양쪽 다 ‘학생’이긴 하지만, 너무 낮아진 자신의 처지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응?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코토리가 갑자기 웃는 나를 보고 궁금해 했지만,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녀도 딱히 큰 관심은 없는지 더 깊게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럼 점심을 같이 먹지 않을래?”

“음? 벌써 점심시간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봤다. 방금 전 수업이 끝나고 막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난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말했다.

“아, 벌써 점심시간이군. 오늘 하루도 빨리 흘러가네.”

“세이토가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아니, 그건 아니지. 창밖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을 뿐이니까. 시간이 빨리 흘러간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어쨌든, 어때? 같이 점심을 먹을래?”

“난 도시락 안 가져왔는데.”

전에 사쿠라 씨에게 도시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사쿠라 씨가 ‘능력이 되면 스스로 만들어서 가져가세요.’라고 말하셨기 때문에 귀찮다는 이유로 도시락을 만들지 않았다. ‘학생식당이라는 편리한 장소가 있는데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야 하느냐.’가 바로 내 생각이다.

내 말을 들은 코토리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건 괜찮아. 오늘은 나도 학생식당이거든.”

“그래? 그럼 상관없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코토리와 함께 교실을 나와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학생식당으로 가는 도중,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들의 이유가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코토리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번에 공원에서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난 이곳에 입학하기 전에 코토리와 만났던 벚꽃 공원에서의 일을 기억했다. 그때도 우리가 앉아 있던 벤치 근처를 지나가는 남자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것을 느꼈었다.

그때는 코토리와 이야기를 하느라 크게 신경을 안 썼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 꽤나 신경 쓰였다. 할 수 없이 이번에도 그녀와 뭔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점심을 먹는 친구들이 있지 않았나?”

내가 본 코토리는 점심시간에 다른 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오늘도 당연히 그 친구들과 함께 먹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코토리 쪽에서 먼저 점심 식사를 권유해서 조금 놀랐었다.

“아 그거? 뭐...........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말끝을 흐리는 코토리에게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로 중요하다곤 생각되지 않아서 넘어갔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끊겨버렸고, 어색한 침묵이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난 말하는 타입이 아니라 듣는 타입인데....’

대화라는 것은 누군가 화제를 꺼내고, 상대방이 그 화제에 대한 리액션을 취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건 물론이고, 화제를 꺼내지 않으면 대화를 시도하지도 못한다.

‘딱히 언제나 화제를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침묵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왠지 모르게 살기도 느껴졌지만, 그냥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코토리는 역시 도시락 파?”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고, 화제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파’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일단 도시락을 주로 싸오는 편이야.”

“도시락을 매일같이 싸오는 거, 귀찮지 않아?”

난 어떻게든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코토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어차피 자신이 먹는 거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고 있어.”

“흠....역시 그런가.....”

코토리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직접 도시락을 만들면 원하는 반찬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고, 영양 밸런스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여자 아이의 경우 다이어트 문제로 먹는 양을 조절할 수도 있다.

“세이토는 요리를 할 수 있었던가?”

코토리는 역으로 나에게 물어왔고, 난 자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조금이라면?”

“그럼 다음에 도시락을 만들어 와. 같이 먹자.”

“뭐...........내키면?”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자니 도시락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드는 과정은 귀찮지만, 마지막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내 시원찮은 대답을 들은 코토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그때가 되면 꼭 말해줘. 친구들도 불러서 같이 먹게.”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순간 강한 살기가 여러 곳에서 느껴졌다. 난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가......가능하면 적은 인원수로 먹는 게 편한데.”

“그래? 점심을 같이 먹는 친구는 2명인데, 괜찮지?”

나와 코토리를 합치면 4명. 그 정도면 나도 크게 부담되진 않는다. 코토리의 친구라고 하면 여학생일게 분명하니까. 여담이지만, 난 여자가 서툴다.

“뭐.....그 정도라면 괜찮겠지.”

“응! 세이토의 도시락, 기대할게.”

활짝 웃으면서 말하는 코토리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 남학생들의 질투의 시선을 느꼈다.

‘아니, 그런 눈빛을 보내봤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있다는 기쁨과 남학생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부담 때문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던 코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

그들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는 걸음속도를 높였고, 코토리도 나를 따라오기 위해 조금 빨리 걷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학생식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겠지만, 그곳에 가면 식사에 집중할 수 있다. 그것이라면 내 집중력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쾅!!!!]


그리고 나의 그런 믿음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또 저 녀석이야....왜 자꾸 얽히는 거야.....”

보는 사람만 없었다면 난 아마 좌절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리카 무라사키. 전에 식권 판매기에 1만 엔을 넣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그녀가 또 문제를 일으켰다.

".....무라사키 씨지? 괜찮을까? 판매기를 발로 찼는데...."

‘그냥 내버려 두고 싶어.....’

그렇다. 그녀는 내가 학생식당에 들어오는 타이밍에 식권 판매기를 발로 찬 것이다. 가서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식권 판매기가 고장 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걸 발로 차겠는가?

“신, 네 녀석.....”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하려는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안 준다.’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생식당에 온 이상 나는 식권 판매기를 이용해야만 하고, 그 식권 판매기 앞에 에리카 무라사키가 있는 것이다. 난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에게 불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무라사키의 외침이 들린다. 화가 나있는지 그녀는 숨이 조금 거칠었다. 그런 그녀를 보니 더더욱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하아....”

“어떻게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라사키를 보고 있는 코토리의 말에 난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단은 같은 반이기 때문에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말이지 얼마나 폐를 끼쳐야 속이 시원한 거야 저 녀석.”

나는 한숨을 쉬면서 무라사키 쪽으로 걸어갔고, 코토리는 내 뒤를 따라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다. 무라사키는 우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깨닫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넌 또 왜 끼어드는 거야!!”

‘.....나도 싫다니깐.’

무라사키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방금 전 그녀가 식권 판매기를 발로 찬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이번에도 저것과 관계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번에도 1만 엔을 넣은 거냐?”

“아니야!!!!”

즉답이다. 그녀를 조금 과소평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건 사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만 내가 편하다. 나도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선 해결이 안 될 것 같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해봐. 나도 이 식권 판매기를 써야한다고.”

씩씩거리던 무라사키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돈은 분명히 넣었는데, 식권이 안 나와!”

여전히 화가 잔뜩 나있는 상태로.

“버튼을 누른 건 확실해?”

“당연하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음.......건방진 공주님?’

입 밖에 냈다간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난 천천히 식권 판매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계산은 끝났는지 잔돈이 나와 있었고, 식권만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식권만 안 나온 것을 보곤 난 뭔가가 떠올랐다.

“분명히 간혹 가다가 식권 판매기가 반응이 느려져서 식권이 늦게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나가는 투로 들었기 때문에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식권이 늦게 나와서 고장 난 줄 알았다는 학생의 말.

‘....라는 건,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결과가 나온단 말?’

난 식권이 나오는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한 곳만 바라보자 화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무라사키도 아무 말 없이 식권 배출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툭]

"어. 나왔다."

“오오오오.....”

“나왔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곧 식권이 하나 나왔다. 그러자 주변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 식권을 무라사키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식권을 받았다.

“하아. 이걸로 또 한 건 해결이군........”

끝났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쉰 그 순간.

 

[툭]

 

“..........”

식권이 하나 더 나왔다. 난 그 식권을 바라보면서 무라사키에게 물었다.

“너, 혹시 식권 여러 개 샀냐?”

“그럴 리가. 하나밖에 안 샀어.”

“................”

 

[툭]

 

식권 한 장이 또 나왔다.

‘이......이건 위험할지도.’

그제서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다. 난 위험을 깨닫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응?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무라사키가 이쪽으로 오더니 가볍게 식권 판매기를 발로 찼다.

“아!! 그걸 차면!!”

“응? 그게 뭐 어ㄸ.......에에에에에에!?!?!?!!!?”

 

[툭툭툭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방금 전 충격으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식권 판매기는 식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까 내가 학생식당에 들어 왔을 때 무라사키가 식권 판매기를 찬 것으로 인해, 식권 판매기가 고장 나서 식권을 마구 뽑아내는 것이다!!

“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결국 나와 무라사키는 식당 아주머니께 크게 혼났고, 뒷정리를 하느라 밥을 먹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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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토-

Posted by 세이토 절반 슈발리에 드 히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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